박정희 그에게 손가락질 하는 너(4)
박정희, 자유 대한의 출발 5.16 혁명.
5.16 혁명 핵심이였던 김종필 전 총리가 언젠가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자유를 좀 누르더라도 경제를 회생시켜야 한다고 봤던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을 어떻게 보느냐?”라고 묻자 키신저 장관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란 사실상 어렵다.
러시아가 이 두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다 어떤 결과를 초래 했는지 다 알고 있지 않는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우리 중 아둔한 일부는 5.16혁명을 정변이라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있지만 세계는 그러하게 보지 않는다.
19~20세기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결과적으로 나라를 구해낸 혁명이 5개가 있다. 그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 터키의 케말 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이다. 그 중 기적으로 분류되는 경제성장을 견인한 혁명은 5.16혁명이 유일하다. 5.16혁명은 비록 군대가 동원된 무력혁명이었지만, 결과는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인 교육받은 거대한 중산층을 만들었다.
지구상의 모든 개도국은 한국을 발전모델로 삼아 국가재건에 나서고자 하고,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은 전적으로 박정희 대통령 경제개발을 벤치마킹 했다.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배우기 위해 해마다 새마을 운동을 배우기 위해 대한민국을 찾는 새마을 연수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5.16 혁명과 그 정신이었다.
좌파들은 5.16혁명을 군사정변 또는 쿠테타로 고의적, 악의적 평가절하 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군 전역 후 대통령 선거에 나서 윤보선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며 대통령에 올랐다. 이는 동시대에 살았던 국민으로부터 5.16혁명의 정당성을 부여 받은 것이며, 재대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승리함으로서 5.16혁명은 국민의 혁명임을 확고히 했다.
혁명을 일으켰을 당시 대통령은 윤보선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대통령을 내치지 않고 정치활동을 보장했으며 그와 2번이나 선거를 치룬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가 실존 권력을 제거하지 않은 쿠테타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도 2번이나 대통령을 놓고 맞대결을 벌린 전례는 세계사에도 유례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선택을 통해 패배한 윤보선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가장 지독한 비판자로 남아 괴롭혔다. 이러한 쿠테타가 세상 어디에 존재할 것이며, 이토록 평화스런 쿠테타가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그것은 혁명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일부 좌파가 쿠테타니 정변이니 하는 말은 언어도단이자 명백한 허위날조이다.
이러한 5.16혁명이 군사정변이고 쿠테타라면 동시대를 살은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혁명이 정변이고 쿠테타라면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역성혁명도 쿠테타요 군사정변인 것이다. 모든 국가의 몰락과 개국은 무력 혁명을 통해 권력이 바뀐다.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국가의 몰락과 개국 사이를 우리는 군사정변, 쿠테타라 부르지 않는다.
5.16혁명 당시 문맹은 80%에 이르렀고, 농민도 80%에 이르렀다. 세계 역사는 민주사회를 이룩하기 전 천편일률적으로 공업화와 산업화를 통한 사회적 부의 축척이 이루어진 후 비로서 민주주의가 발전의 속도를 냈던 것을 반추하면 5.16 혁명을 통한 대한민국 산업화가 없었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 영원한 신기루로 남았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을 일으켰던 당시의 시대상은 참혹하리만큼 민초에게는 고통을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무능은 끝이 없었고, 이승만 뒤를 이은 민주당 정권은 신, 구파, 노장파, 소장파 등 사분오열 찢어져 극심한 정파싸움으로 날을 샜다.
민초는 굶주림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를 두고 백기완 선생은 “지금의 굶어죽는 쥐새끼보다 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라고 회상했다. 3.15부정선거만 없었어도 4.19혁명과 5.16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단편적인 견해를 내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5.16혁명의 도화선은 당시 민초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배고픔과 가난이었다. 또한 그 때의 사회 혼란이었다.
윤보선 - 허정 정부 역시 무지한 이상론에 사로잡힌 무능한 정권이었고, 그 틈을 타고 전 후 숨죽이고 있던 온갖 좌익단체가 발호하여 전국각지에서 봉기하여 년 간 2,000여회에 이르는 시위가 창궐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있되 무정부인 혼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참담함을 통감하던 윤보선 대통령은 혁명 소식을 접하고 첫마디가 “올 것이 왔다”였다. 누군가 당시의 참담한 혼란을 뒤엎을 의인의 출현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준하가 초대 발행인으로 당시 시대상화 민족주의를 대변했던 잡지 “사상계”는 권두언에서 “4.19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라며 극찬했고 “한국의 군사혁명은 압정과 부패와 빈곤에 시달리는 많은 선진국 국민들의 길잡이요, 모범으로 될 것이다”라며 혁명의 당위성을 갈파했다. 그러한 전망은 수십 년이 지난 후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고뇌하던 인간 박정희 그는 5.16 혁명에 대해 생각을 일기로 남겨 놓았다.
“난마와 같이 헝크러지고 부패·부정·무질서·부조리·정체·무기력, 이러한 단어들이 5·16당시의 우리 사회의 일면을 단적으로 표시한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회악과 부조리를 과감하게 척결하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신풍을 흡입하기 위해서도 5·16은 필수적이었다. ”
시대는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사람이 시대를 창조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극복의 중심에 이순신 장군이 있듯, 혼란과 질곡의 근, 현세사 중심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 그리고 희망의 현대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5.16혁명을 통해 비로서 출발된 것이다. 5.16은 역사상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혁명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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