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그에게 손가락질 하는 너(3)
유신헌법으로 설녕 내가 희생되어도 내 자식은 잘 산다.
박정희, 조국을 위한 최선의 선택 유신헌법.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에 마지막 가는 길을 보고자 몰려든 민초는 “취임할 때 하루 일하면 보리 한 대빡이었는데, 가실 때는 쌀 두말을 받는다”며 울부 짖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박정희 대통령의 최대 업적은 국민의 주린 배를 채워 준 것이다. 절대적 빈곤 속에 주린배를 채우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배고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때 우람한 민주주의를 꽃 피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혁명가 박정희 그에게 내린 첫 번째 사명은 숙명적 가난을 물리치는 것이었고 그것은 부여 받은 최대 사명이었다.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고 인권의 출발이었다.
지구상에 가난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성취한 전례가 없고, 가난한 나라에서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 하는 경우도 드물다. 뉴스 매체를 장식하는 인권문제가 시끄러운 곳은 언제나 가난한 나라이다. 현재 지구상에 민주국가로 분류될 수 있는 나라는 수십개국에 불과하고, 그 수십개국 중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도 드물다. 따라서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민주주의는 사상누각에 불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것에 통찰하고,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룩함으로써 경제적 부를 일구고, 그 토양위에서 우람한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신념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경제성장을 통한 중산층을 양산했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산층은 교육까지 성취함으로서 비로서 민주사회의 기둥이 되었다.
60년대 가발을 비롯한 경공업 제품으로는 국부창출의 한계를 갈파한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을 통한 산업화를 완성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착실하게 그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지금 상업화 공업화에 매진하고 있지만, 중화학 공업의 바탕이 없는 동남아 국가들이 한계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통찰력이 얼마만큼 위대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화학 공업의 토대를 마련하던 70년대 초 지금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는 포항제철을 비롯한 자동차산업, 조선산업, 전자산업, 기계산업, 석유화학 산업의 본격적 건설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돈 있는 사람들 팔도 유람용이라며 경부고속도로 반대투쟁에 나서 길바닥에 드러눕던 김영삼, 김대중 같은 청맹과니에게 권력을 쥐어 준다면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주의는 사상누각,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월남패망에 맞추어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들의 피를 흘린 뜻이 없음을 공고히 했다. 언제든 총칼을 앞세워 또 다시 수백만을 죽이고도 남을 북괴를 막아내야만 했다. 따라서 유신헌법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었다.
만약 유신헌법이 없었다면, 포항제철 건설 반대나 일삼았던, 외환위기와 신용대란과 같은 경제환란이나 일으킨 양김의 무능함으로 그 시대를 이끌었다고 가정하자. 두 번의 오일쇼크 속에 중화학 공업은 온전했을까를 생각하면 머리부터 가로 젓게 된다. 세계 최대 철광자원보유국이며 생산국인 브라질은 1940년대 이미 자그마한 제철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브라질도 국운을 걸고 제철산업을 육성하다 실패하였다. 결코 개도국은 제철산업은 될 수 없다는 선입감이 굳어졌다. 그러나 지금 브라질은 우리나라에게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중화학 공업 육성에 모든 국력을 동원하던 1974년 유신시대에 유신한국이 너무 싫었던 어느 여대생은 스스로 유학도, 망명도 아닌 그 시대의 “사상적 난민자”가 되어 호주로 떠났다. 호주 국립대 교수로 성공한 그녀는 지금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를 재조명하며 연구하고 있다. 호주에서 유신을 증오하며 김일성을 연구하던 그녀는 어느날 거인 박정희와 만났고 마침내 “유신체제와 그 시대의 산업혁명을 분리해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동전의 양면이다”라고 고해성사를 하기에 이른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인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근대화 작업의 추진자로 한국은행 출신 김정렴 비서실장, 자동차 회사 공장장을 지낸 오원철 등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를 선택하여 3두 체제를 구축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권력을 지탱해줄 충성도 높은 혁명동지가 아닌 국가중흥을 위한 인재를 가장 맨 앞줄에 세웠다. 이를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결코 권력욕이 아닌 국가중흥이었음을 방증하고 있다.
살면서 유신헌법으로 고통 받았다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기회를 얻기 위해 유신에 도전하여 겪은 불편함이 전부이며 그 숫자도 극히 적다. 격랑의 시대를 열심히 헤쳐왔던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유신헌법에 설녕 내가 희생된다 해도 내 자식은 잘 살 수 있다"는 미래지향적 희망을 가슴에 심어 주었다. 더불어 유신헌법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크게 갖게해 준 활인법(活人法)이었다고 정리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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