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지식정보

영국의 장례문화

동 아 2009. 1. 1. 22:51

<영 국> 주민들과 마찰 전무,영국의 선진 장묘문화

지자체서 의무분양
리무진 「꽃상여」가 묘지정문으로 들어온 뒤 화장장 건물 앞에 멈춰 선다. 서너 대의 승용차에 나눠 타고 뒤따라온 검은 예복 차림의 가족 친지 10여명은 1층 장례식장에서 간소하게 예배를 드린 뒤 삼삼오오 모여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1시간쯤 후 유골을 항아리에 넣은 다음 묘지 관리인의 도움을 받아 화장장 뒤쪽 잔디묘지에 묻고는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한 뒤 조용히 집으로 돌아간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묘지는 빼곡히 들어선 나무와 이름 모를 새소리가 어우러져 자연학습장이나 공원같은 느낌을 준다.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다람쥐가 노니는 광경도 자주 눈에 띈다. 어디를 가나 끝없이 이어진 구릉지대와 초원, 그 위에 듬성듬성 누워 있는 마을,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의 모습 등 목가적 풍경이 펼쳐져 있는 나라. 유럽대륙 서북부의 섬나라 영국은 깨끗하고 아름 다운 연경관과 함께 간소한 장례식, 공원같이 잘 가꿔진 묘지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4개 지방 가운데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산간지방을 제외하고 국토의 대부분이 완만한 구릉지와 평원지대다. 15~17세기 제1차 인클로저 운동에 이어 18세기이후 인구증가에 따라 식량수요가 늘어나자 경작지확대를 목적으로 2차 바뀌었다. 이에 따라 주거가능 면적비율이 64%로 높아져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와 비교해 3배이상 국토이용여건이 좋아졌다.

 

남북한 면적의 1.1배(약 24만4천㎢) 땅에 5천7백여만명이 살고 있는 영국에서는 지방자치단체가 의무적으로 주민들에게 묘지를 분양, 시신처리문제를 해결토록 하고 있다. 상제를 개인사로 간주해 관청이 나몰라라 하는 우리와는 이처럼 시작부터 다르다.

이런 제도는 아무 곳에나 무덤을 쓰지 않고 생전의 숨결과 추억이 깃든 주거지 가까이에 묘지를 만들어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문화를 일궈냈다. 신분과 지위, 재산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죽어서는 모두가 잘해야 1평남짓 차지한 공간에 비석만 세워진다.

한곳에 4구까지 합장
영국 사람들은 출퇴근길 점심시간 주말 등에 틈틈이 꽃을 들고 묘소를 찾는다. 공원처럼 휴식공간으로 묘지를 활용하기도 한다. 힘이 있거나 돈푼깨나 있다고 해서 호화로운 분묘를 만든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런던에서 북동쪽의 대학도시 케임브리지 방향으로 20km쯤 가면 그레이트케임브리지 로드 오른쪽 마을 한복판에 엔필드 공동묘지가 나온다. 1936년 개설한 5만여평의 공설묘지로 39년 화장시설까지 갖췄다. 약 2m 높이로 정갈하게 다듬어진 정문 조경목 사이를 지나 2백여m 들어가면 관리사무실과 화장장을 겸한 2층건물이 있고 뒤편에 잔디로 덮인 묘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매장 또는 화장한 뒤 재를 땅에 묻거나 항아리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하는 등 여러 형태로 시신을 처리했으나 현재 공간이 부족해 매장은 거의 중단한 상태다. 2층건물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1백m쯤 돌아가면 양쪽에 가로 80cm, 세로 2m40cm 크기의 무덤들이 맞대고 누워 있는 널따란 묘역이 나온다. 땅을 3.3m 깊이로 파고 사망한 순서대로 관을 차곡차곡 묻은 곳으로 가장 위쪽의 관이 지표에서 1m 깊이에 묻혀 있다.

 

2차대전때 6.6m 깊이로 6~7구의 시신을 층층이 묻기도 했으나 지금은 한 무덤에 4구까지만 「합 장」하고 있다. 바둑판처럼 반 듯하게 정렬된 무덤들 사이에는 매장작업할 때 소형굴착기가 드나들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다.

무덤마다 가로 75 세로 30 높이 90cm의 기념비가 서있고 기념비 앞에는 참배객들이 갖다놓은 꽃들이 향기를 뿜고 있다. 기념비는 크기를 엄격히 제한하고 재질도 자연석만 허용하기 때문에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만든 십자가 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장장 건물 뒤쪽 나지막한 둔덕에는 가로 세로 2m의 간격으로 높이 1m안팎의 나무를 심고 그 밑에 유골을 묻는 잔디광장이 자리잡고 있다. 나무 밑에는 꽃을 심거나 꽃을 꽂을 수 있는 병 또는 받침대가 설치돼 있고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물연대를 적은 손바닥만한 표석이 걸려 있다.

 

「사랑하는 새뮤얼 리드 체이스를 기억하며. 1913년 12월 16일 태어나 1993년 11월 16일 사망하다. 우리의 머리속에 영원하라」고 쓴 표석이 눈에 들어왔다.

화장장 건물 오른쪽에는 「존 워커 납골당」이라 부르는 서가식 실내납골당건물이 있다. 뒤쪽으로는 1m 높이의 벽돌담에 가로 50cm, 세로 30cm 크기의 네모꼴로 30cm쯤 움푹하게 판 뒤 유골을 담은 항아리를 넣고 봉한 실외납골당이 있다. 실내 납골당안 중앙 탁자위에는 꽃이나 회사의 표장 및 문장과 생물연대, 가족 친지들이 죽은 자를추모하는 말들을 컬러펜으로 기록해 영구 보존하는 두툼한 「추억의 비망록」이 높여 있다.

 

이 공동묘지는 원칙적으로 30년동안 임대 사용하되 1백50파운드를 추가로 내면 다시 30년을 연장할수 있다. 매장할 경우 맨아래층 1천5백만파운드에서 맨위층 5백40파운드까지 위치에 따라 차등을 두어 임대료를 받고 있다.

 

주민들과 마찰전무
화장할 때의 임대료는 1백80파운드(약22만원)에 불과하며 유골을 뿌리지 않고 땅에 묻을 경우에 한해 1백30파운드(약17만원)을 추가로 징수한다. 남의 무덤이라도 사자가족 등의 동의를 얻을 경우 같이 매장하거나 유골을 뿌릴 수 있다.

이안 하프 관리소장은 『예전에는 대부분 매장했으나 94년의 경우 3천8백구의 시신중 매장은 1백여구에 불과할 정도로 화장이 부쩍 늘고 있다. 화장한 뒤에도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과 땅에 뿌리는 것이 절반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화장장이 딸린 묘지가 마을 한복판에 있지만 주민들과의 마찰은 없다』고 말했다.

 

화장률70% 유럽 최고사설 공동묘지 주민기금 출연
자선단체식 운영 기념비 등 정교하게 다듬어 조각공원 온 듯
영국은 1831년 콜레라가 런던 등 전역을 휩쓴데다 산업혁명이 숨가쁘게 진행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연간 수만명의 사망자를 교회구내 묘지에 모두 안장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영국의회는 한 변호사가 주도한 켄살 그린 사설묘지 설립을 허용하고 교회지하에 시신을 두는 비위생적 장례관행을 금지시켰다.

콜레라 창궐 묘터난
그러나 초기에는 교회구내에 묻혀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켄살 기린 묘지를 찾는 경우 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교회구내에 시신을 처리해 주는 대가로 매장수수료를 받아온 교회조직도 이 권이 없어지는 것을 꺼려 신자들이 사설 묘지를 찾는 것에 반대했다.

 

콜레라 창궐과 함께 묘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자 의회는 소액의 헌금을 교회에 내고 사설묘 지에 시신을 묻도록 의무화하는 법령을 만들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개장 7년만에 켄살 그린의 주가가 7배이상 폭등하는 성공을 거두면서 15년만에 런던외곽에 7개의 공동묘지가 만들어 졌다. 이어 1895년 런던교외에 화장장이 들어서고 1902년에는 화장법이 공포됐다.

현재(柱: 1995년) 영국의 화장률은 70%정도로 유럽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하며 정부에서는 더욱 적 극적으로 화장을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설공동묘지는 점점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주민들 이 기금을 출연, 법인성격의 자선단체를 만들어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 만들어진 묘지 중의 하나로 런던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10km쯤 떨어진 해링 게이 자치구 스웨 인스 레인의 '하이게이트공동묘지'를 들 수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2차선도로 양쪽 나지막한 언덕기 슭 아늑한 숲속에 공원같은 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에게는 혐오시설로 인식되는 묘지가 약 2m 높이의 담장을 경계로 주택가 한가운데 들어서 있 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곳은 빅토리아여왕 재위초기인 1839년 만들어진 4만5천명 크기의 사설묘지로 런던으로 이주했던 독일태생 사상가이자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 많은 명사들이 묻혀있어 참 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묘지는 빅토리아왕조시대 특유의 건축 및 조각양식에 바탕을 두고 정문과 건물들을 기품있게 만 들었다. 또 엄숙한 느낌과 종교적 분위기가 살아 남도록 묘지를 설계하고 나무와 꽃을 많이 심었다. 때문에 런던공동묘지회사가 변두리에 세운 '하이게이트묘지'는 점차 인기를 끌어 부지가 부족해짐에 따라 1854년 인접지역에 또 하나의 묘지를 만들어 확장했다.

이후 먼저 묘지를 서부지역묘지, 뒤에 만든 묘지를 동부지역묘지로 각각 부르고 있다. 기자가 묘지 에 들렀을 때 마침 지하묘지(카타콤베)가 있는 서부지역묘지가 문을 닫아 1파운드의 입장료를 내고 동부지역묘지를 둘러봤다. 사진촬영 대가로 1파운드를 추가로 냈다. 마치 공원산책로 같은 진입로를 따라 50m쯤 들어가자 양쪽으로 가로 80cm 세로 2m 가량 크기의 무덤들이 화강암이나 대리석 평석 에 덮여있는 묘역이 나타났다.


 

1902년 화장법 공포
머리맡에는 검고 희거나 불그스름한 색깔로 십자가 모양을 하거나 죽은 사람을 기리는 글귀와 사진 등을 새겨넣은 기념비들이 크고 작은 높이로 줄지어 서 있었다. 검은 돌을 굴뚝처럼 우뚝 세우거나 흰색의 여인상을 정교하게 조각한 기념비들로 세워져 있어 조각공원에라도 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무덤에는 바구니나 꽃병에 담긴 소담한 꽃들이 놓여 있다. 안쪽에는 시신을 화장한 재를 항아리에 담아 가로 60, 세로 40cm 넓이로 묻은 다음 네모난 돌로 덮어 놓은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한 무덤에 4개의 항아리를 묻은 곳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동부지역 동북쪽 정문으로부터 약 1백m 떨어진 길모퉁이에 동쪽을 바라보며 외롭게 잠들어 있다. 2m 높이의 화강암 좌대위에 청동으로 만든 마르크스 두상이 설치되어 있고 묘비 상단에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 인 "전세계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평범한 마르크스 무덤
마르크스와 아내 제니, 가정부이자 정부 헬렌 데무스, 셋째딸 엘러노 등 모두 6 명이 묻혀 있는 마르크스 무덤에는 엊그제 참배객들이 다녀간 듯 시들지 않은 꽃송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의 철학이 적어도 1백년이상 전세계의 절반이상을 지배했던 사상가요 혁명가의 묘답지 않게 공동묘지 한구석에 평범하게 잠든 모습이 놀라웠다.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는 마르크스 말고도 물리학자이자 화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 ,여류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허버트 스펜서, 여류소설가 메어리 앤 및 중남미 트리니다드토바코 출신 여성혁명가 클로디아 베라존스 등 많은 명사들이 잠들어 있다.

 

묘지 관리인 '다운 스퀴어씨(35.여)'는 "이곳에 묻힌 6만여명 중 80%가 화장한 재를 땅에 묻은 것"이라면서 앞으로 10년 가량 지나면 묘지가 꽉차 "새식구" 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퀴어씨는 "이곳은 미리 묘터를 살 수 없고 죽은 뒤 국적에 관계없이 장소를 골라 사용 할 수 있다"며 "사설묘지이기 때문에 임대료가 공설묘지보다 훨씬 비싸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매장할 때 묘지 임대료 2천 파운드와 땅 파는 비용 5백파운드 등 모두 2천5백파운드(약3백 37만원-注:1995년기준))가 들지만 화장의 경우 훨씬 적은 5백파운드(약 67만원-注:1995년기준))를 받고 있다.

 

런던 해링게이 자치구는 1856년 만들어진 관할 토튼햄 묘비가 꽉 차고 런던 북부지역 주민들의 묘지로 사용하는 엔필드 묘지마저 포화상태에 육박하자 지난해 11월 구입식물원과 '화이트하트' 운동장 사이 공터에 60년간 사용할 약6천평 크기의 새묘지를 만들었다. 이 우드그린 묘지는 모슬렘에게는 이슬람교가 요구하는대로 동쪽을 향해 시신을 묻도록 하는 등 주민들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 맞춰 운영하고 있다.


'알란 도비' 구청장은 "새 묘지를 만들어 시급한 묘지 부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돼 자랑스럽다"며"이제 런던북부지역 주민들은 먼곳에 '영원한 휴식처'를 마련해 성묘를 하는 걱정과 번거로움에서 벗 어날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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