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다녀온 육영수가 ‘미국은 다람쥐도 크더라’고 했다. 외국인의 눈에는 한국은 송아지도 작았다. 제주도에서 이시돌 목장을 경영했던 PJ 매크린 신부는 한국의 송아지가 작은 것은 충분히 먹지 못하고 농민들이 먹이를 흡족하게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정희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오. 내가 이렇게 작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오. 우유는 고사하고 밥 한번 배불리 먹어본 일이 없으니 이렇게 작은 것도 무리는 아니지.” 구미 시절의 작은 소년 박정희는 길이 들지 않은 황소를 풀 먹이러 끌고 가느라고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고 한다. 그 시절 동네에 부잣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에서 모내기하는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를 했는데, 그때 따라가서 얻어먹은 밥과 반찬 맛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더라고 말했다. 특히 호박잎에 싸서 먹은 자반고등어 한토막이 그렇게 맛있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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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회의 의장 시절인 1962년 6월3일 경기 김포에서 모심기를 하고 논두렁에서 농부와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하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비를 내려주지만, 게으르게 앉아서 놀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비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김인만 서울포스트 | 가난한 농민의 아들 박정희의 가슴에 응어리진 소원이 바로 잘 사는 농촌을 만드는 것이었다. 국민의 7할이 농민인 농업국가이면서도 1년에 식량을 200~300만톤씩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의 권력을 잡고 그가 혼신의 열정을 기울인 것이 아득한 날로부터 대물림되던 보릿고개와 춘궁기를 없애는 일이었다. 그는 농촌의 가난을 연민의 정으로만 대하지는 않았다. 가난의 원인을 농민에게 있다고 보았다.
혁명정부 시절, 헬리콥터로 한해지구를 내려다보면 보리가 타들어가는데도 저수지나 관정(管井)의 물을 그대로 두고 있는 곳이 적지 않았고, 그가 직접 물을 푸고 모를 심어도 부락 청년들은 나무 그늘에서 빈둥거리고 노인들은 담뱃대를 물고 나와 구경을 했다. 그는 농민의 게으르고 무기력한 자세를 개탄해 시골 군수들을 매섭게 다그쳤다.
해마다 겪는 보릿고개에 부지기수의 농민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부황증에 걸린 사람들이 산과 들을 비실비실 헤매는 비참한 실정임에도 충남 부여군 석성면에 들르니 면장이 마을에 절량농가(絶糧農家)가 얼마나 되는지를 모르고 있었고, 부여군청에 가니 절량농가 대장이란 것 자체가 있지 않았다.
1964년 7월5일에는 지방시찰을 마치고 기동차 편으로 귀경하던 중 차창 너머로 수로에 물이 흐르는데도 모내기를 하지 않은 채 방치된 마른 논바닥을 보았다. 대구를 지나 약목역에 이르자 비서실장에게 기동차를 다시 대구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대구에서 예정에 없는 1박을 하고 이튿날 경북도청에서 한해대책회의를 주재했다.
“옆에 물이 흘러가는 수로가 있어도 물을 퍼서 모를 심지 않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오?” 따끔하게 질책을 하고 한해가 심한 칠곡·금릉·선산·달성·성주 등 8개 군의 군수로부터 모내기 상황을 보고 받았다. 칠곡군이 72퍼센트로 가장 저조했다.
“군수, 그 팔뚝이 뭐요!” 칠곡 군수의 흰 팔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일 게으른 군의 군수 팔뚝을 보니 가장 희구만. 들에 나가 모내기 독려를 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상황 설명만 들어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요!” 군수와 면장들이 앞에 나서라고 다그쳤다. 비가 안와도 물은 지하에 얼마든지 있으니 관정을 파서 양수기로 끌어올리라는 것이며, 게으른 농민들을 끌어내라고 호통을 쳤다. 항상 하늘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면서 게으른 자에게는 절대 공짜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다가 7월 15일 밤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더니 시원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전화로 부산시장을 불렀다.
“거기도 비가 와요?” “네 각하,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부인 육영수와 함께 지프에 올랐다. 지프는 빗속을 뚫고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를 돌아 경기도 과천 쪽으로 내달려 물이 흥건히 괸 논두렁 옆에서 멈추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단비를 머금고 생기가 오른 못자리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육영수는 그때 비를 흠뻑 맞고 선 대통령 남편의 자리를 이렇게 말했다. “그 자리가 얼마나 막중한, 두렵고 힘에 겨운 자리인데 이 자리에 앉아 다른 잡념을 가질 수 있을까요.”
1970년대에 접어들어 새마을운동이 활발해지면서 농촌 시찰을 하는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꼬불꼬불한 길이 넓혀지고 묵은 가난을 덮었던 초가지붕을 기와로 바꾸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다고 측근들은 말하고 있다. 어느 해 경상북도를 초도순시하러 헬리콥터를 타고 가다가 농민들이 지붕을 고치는 모습을 보고 예정에 없이 그 마을에 들렀다. 달라지는 농촌의 모습만 눈에 띄면 만사불고하고 그 현장에 가야만 했다. 공중에서 헬리콥터가 내려오니 농민들은 웬일인가 하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TV에서만 보던 대통령이 갑자기 나타나니 놀라고, 흙 묻은 손을 잡아주는 따뜻함에 순박한 농심이 감격하곤 했다.
박근혜는 아버지가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깨끗이 정돈된 농촌 마을을 보고 무척 흡족해 했다고 말한다. “우리 신당동 집은 명함도 못 내밀겠다. 농촌의 집이 대통령의 집보다 좋은 것은 흐뭇한 일 아니냐.” 그러면서 미소 짓던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했다. 박정희는 권농일이면 청와대에서 집무하지 않았다. 반드시 농촌에 가서 모를 심었다. 가을 벼베기 돕기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허리 굽혀 모를 심는 익숙한 몸놀림하며 밀짚모자에 바지춤을 걷어올린 모습이 전혀 이질감을 주지 않는 농촌 사람 그대로였다.
일을 하고 나면 논두렁에서 으레 농부들과 걸쭉한 막걸리를 마셨다. 논두렁 막걸리는 그냥 술이 아니다. 허기를 달래주는 음식이고, 근로의 몸을 풀어주는 피로회복제다. 풋고추나 김치 한쪽도 막걸리의 맛을 돋우기에 충분하고, 앞서 모내기를 끝낸 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은 또한 멋진 자연 교향악이다.
박정희는 논두렁에 퍼더버리고 앉아 마시는 막걸리가 최고라고 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 하듯, 박정희는 막걸리라면 이것저것 까다롭게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즐겨 마신 것들이 따로 있기는 하다.
청와대에서 즐겨 마신 ‘고양 막걸리’는 골프장에 갔다가 인근 실비집에서 처음 맛을 본 뒤 매주 한두 말씩 시켜다 14년 동안 마셨다고 해서 유명하다. 대구에 가면 군시절에 마신 팔공산 자락의 천연수로 빚은 ‘불로 막걸리’를 말통으로 사갔으며, 부산에 가면 부산 군수사령관 시절에 마셨던 금정산 산성마을의 ‘산성 막걸리’에 흠뻑 취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논두렁에서 마시는 막걸리가 최고라고 했다.
그는 일하지 않고 막걸리를 마시면 트림만 나고 오줌만 마렵다고 말했다. 막걸리는 일하는 자의 술이라는 것이다. 막걸리에는 땀을 식히고 피로를 풀어주는 시원함에 감돌아드는 노동의 기쁨이 있다. 거기에 진정한 막걸리의 맛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막걸리 사랑은 곧 농촌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랑은 남달랐다. 마음만의 사랑이 아니고, 행동하는 사랑이었다. 불쌍한 것을 그냥 동정하지 않았다. 지난날의 게으르고 도박을 즐기고 가난에 찌들어도 팔자려니 하고 한숨 쉬는 타성을 미워했다. 미운 건 밉다고 했다. 그 미움을 지워 부지런하고 자조, 자립의 의욕에 넘치는 농심으로 바꾸었다. 그의 농촌 사랑에는 미움을 지우고 얻은 사랑이 도탑게 쌓여 있다.
그 사랑이 박정희만이 아는 논두렁 막걸리의 참맛이었을 것이다. (*)
▣ 출판편집인 동화작가 김 인 만
서울포스트 http://www.seoulpos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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