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박정희대통령의 마지막 날 아침

동 아 2007. 10. 6. 01:33
 

 박정희대톨령의 마지막 날 아침

 

-수선한 바지를 입고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10월26일 아침을 이렇게 맞았다. 
[근대화 혁명가 박정희 생애-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인용.
이 글에서 우리는 독재자라고 비난받기도, 근대화의 기수로 칭송받기도 하는
인간 박정희의 소박한 모습을 보게 된다.
김일성-김정일의 타락한 호화판 생활과 비교하면
왜 남북한의 차이기 생겼는지 알 수 있다.


효자손, 카빈소총, 벽돌

썰렁한 침대위에서 박정희대통령은 눈을 떴다.
맞은 편 벽에 걸린 고 육영수여사의 커다란 초상화가 맨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동창밖으로 번지는 여명에 아내의 미소 띤 얼굴이 점차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화로 그려진 초상화 아래로는 붙박이 단이 있고


그위에는 국화가 꽂힌 노란색 화병 두개와 책 한권이 놓여 있었다.
책은 박목월시인이 쓴 '육영수 여사'로서 나무 상자에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1974년 8월15일 광복절 행사에서 문세광의 총탄에 상처한 이후
아내 생일에는 직접 꺾은 국화 송이를 초상화 밑에 가지런히 얹어 놓곤 했다.

아내가 없는 공간을 대신한 것은 박정희의 머리맡을 차지한 '효자 손'이었다.
플라스틱 막대 끝에 스테인레스로 된 손이 달린 것이었다.

62세로는 단단한 체구를 가졌던 박정희는 그 무렵
노인성 소양증세를 비롯해 세가지 질병을 갖고 있었다.
온몸, 특히 등쪽이 가려웠던 박대통령은 이 때문에


순면 내복을 입었고 가려움증을 없애준다는 알파케일을 주치의로부터 구해
목욕물에 풀어 몸을 적셔 보기도 했지만 별무효과였다.
밤중에 가려움이 심해도 등을 긁어 줄 사람이 곁에 없어
효자손을 반려자로 삼고 있었던 홀아비가 박정희였다.

1960년대에 그는 축농증의 일종인 부비동염 수술을 받았으나 곧 재발하였다.
1978년 하반기에 대통령은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다시 코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코를 통한 호흡이 원활하지 못하여 편도선 주위염이나 목감기를 자주 앓았다.
그 며칠 전에도 대통령은 목감기가 들어있었다.

노인 박정희를 괴롭힌 세번째 질병은 가벼운 궤양성 소화장애였다.
그 1년 전쯤 박 대통령은 2층 침실에서 자다가 토사곽란을 만난 적이 있었다.
고통을 참지못한 대통령은 1층 부속실로 통하는 인터폰 부저를 눌렀다.
숙직중이던 박학봉 비서관이 뛰어 올라왔다.

대통령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내가 변소에 열번 이상이나 다녀 왔는데…"라고 했다.
주치의를 긴급 호출한 박 비서관은 대통령의 배를 주물러 드렸다.
연락을 받은 주치의가 한밤중에 청와대로 달려와 진통제를 주사했다.

잠시 후 고통이 수그러들자 비로소 대통령은 잠이 들었다.
박 비서관은 잠든 대통령에게 이불을 덮어 드렸다.
그 휑한 방에 대통령을 혼자 남겨두고 나오려니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침대 발끝 오른편엔 카빈 소총 두 정을 걸어 둔 나무 총가가 놓여 있었다.
탄창과 실탄은 총가 밑 서랍에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한 달 전쯤 박비서관을 시켜 이 총을 청와대 경호단에 반납시켰다.
총가가 있던 자리에는 희미한 자국만 카페트위에 남아 있었다.
총으로 권력을 쟁취했던 박정희는 그 총구가 언젠가는 자신을 향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통령은 맨 먼저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동쪽 창문을 비롯,
서재와 거실의 창문들을 활짝 열어 젖혔다.
청와대 본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박대통령의 창문여는 소리와 함께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지어진지 40년째가 되었던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이 욕실에 들어가 물 트는 소리 조차 아래층에서 다 들을 수 있었다.
침실 옆 욕실 변기의 물통속에는 대통령이 아무도 모르게 넣어 둔
빨간 벽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일과시간에 사용하는 1층 집무실 옆 대통령 전용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석유파동 이후부터 골프를 삼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나면
어김없이 본관 부속실로 연결된 인터폰을 눌렀다.

"운동하자".

대통령을 측근에서 수발하는 제1부속실 직원은
당시 박학봉 비서관과 이광형 부관 두 사람이었다.
이들이 대통령 집무실에 근무하면서 교대로 숙직을 했다.
그날 아침 숙직한 직원은 이광형 부관(당시 32세)이었다.

이 부관은 운동복 차림에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현관앞으로 나와 대통령을 기다렸다.
잠시후 대통령도 운동복을 입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나란히달렸다.
청와대 본관을 빙 둘러 쳐진 철망을 벗어나 동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면
상춘제가 나타나고 이어서 실내 수영장.

석유파동 직후 대통령은
"수영장에 물을 넣고 하면 돈도 많이 드는데
마루를 깔고 배드민턴이나 치도록 하자"
고 지시해
실내 수영장 이 실내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환갑을 넘긴 대통령과 배드민턴을 치고 나면 젊은 이 부관도 땀으로 온 몸을 적셔야 했다.
운동이 끝나자 이 부관은 도구를 챙겨들고 대통령과 함께 본관으로 돌아 왔다.

이날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하기로 일정이 잡혀져 있었다.
이 부관은 박 대통령의 양복과 구두를 챙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2층 거실의 대통령으로부터 인터폰이 울렸다.

"예, 이광형입니다"
"어제 입었던 그 양복하고 구두, 그거 가져 오게"
"예, 알겠습니다"
'어제 입었던 양복과 구두'란 허리단을 수선한 곤색 양복과
금강제화에서 맞춘 검정색 구두를 말한다.


한해 전 코 수술을 받은 직후부터 담배를 끊었던 대통령은
몸무게가 60kg에서 3∼4kg쯤 불었다.
1층 집무실로 출근할때 자신이 전날 입었던 양복바지를 든채 내려온 적도 있었다.


대통령은 부관에게 바지를 뒤집어 허리 뒷단을 보여주며
손가락 으로 정확히 폭을 재 보이고는 "여기 요 만큼만 더 늘려주게"라고 했다.
부속실 직원들은 을지로 2가에 있던 '세기 양복점'으로 옷을 보내어 고쳐 오도록 했다.

그날 대통령의 마지막 양복을 준비했던 이광형(현재 삼양산업 부 사장)은
"바지는 수선해서 입고 구두 뒤축을 갈아 신은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이 부관은 평소보다 십여분 늦게 양복과 구두를 들고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대통령은 거울 앞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자주색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체는 반바지 모양의 팬티 차림 그대로였다.


대통령은 이 부관이 들어서자 "어, 어, 이리 가져와"하며 반겼다.
농촌 시찰이 있는 날 대통령은 소풍가는 소년처럼 들떠 있곤 했다.
이날도 늦게 올라 온 양복을 받아 입으며 연신 어깨를 들썩이면서
알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 흥얼했다.

권력이란 갑옷을 걸치기 직전 박정희라는 한 인간의 내면을 엿보게 하는 것은
고독, 무인, 절약의 상징물인 효자손·카빈 그리고 변기 속 벽돌이었다.
그는 양복을 입음으로써 이같은 자신의 내면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감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