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새누리 대선후보 박근혜

동 아 2012. 8. 21. 23:35

박근혜 "아빠 장례식 때 팔다리에 웬 큰 멍이…"

[대선후보까지 걸어온 길] ① 출생에서 10·26까지
유년 시절 - "모래주머니·고무줄·공기놀이 잘해 골목대장 되기 충분"
대학 시절 - "한쪽서 데모 벌어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뿐"
어머니 죽음 - 프랑스 유학 중 귀국…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
아버지 죽음 - 國葬 치른 후 피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 빨면서 울어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는 '근대화의 아버지'와 '독재자'라는 양면적 평가를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다. 그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 뒤 2007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게 됐다.

◇출생과 학창 시절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 셋집에서 박정희와 육영수 사이의 첫딸로 태어났다. 재혼의 박정희는 당시 35세, 초혼인 육영수는 27세였다. 박근혜 가족은 이어 서울 동숭동, 고사북동, 노량진 등의 셋집을 옮겨다니다 1958년 신당동에 있는 대지 100평, 건평 30평의 일본식 단층집으로 이사했다. 박근혜는 1958년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박근혜는 역사소설을 즐겨 읽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모래주머니놀이,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세 종목을 두루 잘하면 동네 골목대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골목대장이 되기에 충분했다"고 했다.

1961년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박정희는 제5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박근혜 가족의 청와대 생활이 시작됐지만 박근혜와 동생 근령은 신당동 집에 살던 외할머니 이경령에게 맡겨졌다. 어머니 육영수가 청와대에서 학교까지 자동차로 통학하게 되면 자식들이 특권 의식을 갖게 될까 염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박근혜 후보가 1960년대 중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어머니 육영수 여사(맨 왼쪽)를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후보, 여동생 근령씨, 남동생 지만씨. /박근혜 후보측 제공
대통령의 딸로 사는 것에 대해 박근혜는 "혜택을 누린 점도 있겠지만 청와대 생활은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나날"이라고 했다. 성심여중 1학년 때 학교 기숙사에서 지낸 박근혜는 2학년 때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대통령의 딸이 전차를 이용한다는 소문이 파다할 즈음 전차 차장이 성신여중 배지를 단 박근혜에게 "너희 학교에 대통령 딸이 다닌다면서?"라고 꼬치꼬치 물었다. "예쁘게 생겼니", "공부는 잘하니"라는 질문에 시치미를 떼고 "글쎄요", "잘하나 봐요"라고 대답했다고 박근혜는 2007년 자서전에서 밝혔다.

성심여중 시절 단짝 몇 명이 청와대에 놀러 왔다. 가족실과 박근혜의 방을 둘러본 친구들의 반응은 "뭐야, 공주처럼 꾸며놓고 사는 줄 알았는데…"였다고 한다. 점심 도시락도 잡곡밥에 달걀말이, 콩자반과 깍두기 정도로 친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자서전에 썼다.

박근혜는 성심여고를 거쳐 1970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는 역사학과에 가기를 희망했지만 박근혜는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다고 했다. 등하교 때 신촌로터리까지 관용차를 타고 가서 학교까지는 걸어 다녔다. 올 초 SBS 예능 프로그램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근혜는 "대학교 때 본받고 싶은, 선망의 대상인 선배가 있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사랑이 아니었나 싶다"고 했다.

박근혜 후보(맨 앞)가 1960년대 말 성심여고 재학 시절 열린 체육대회에서 소프트볼 놀이를 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 측 제공
박근혜가 서강대에 재학 중인 1972년 박정희는 '10월유신(維新)'을 추진했다. 대학가에는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근혜는 "한쪽에서는 데모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캠퍼스 안은 평화로웠다",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물러가라"고 데모하다 2학년 때 퇴교당한 과(科) 친구의 어려운 처지를 전해 들은 박근혜는 어머니에게 부탁해 취직과 복교를 돕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 그리고 10·26

어머니가 1974년 8·15 경축행사에서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박근혜는 프랑스 유학생활을 접고 급거 귀국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던 그때의 심경을 '심장이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에 몸서리쳤다'고 기록했다.

22세의 박근혜에게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일기, 1974년 11월 10일).

박근혜 후보(맨 오른쪽)가 1970년 서강대 재학 시절 열린 개교 10주년 행사에서 전자공학과 깃발을 들고 남학생들과 가장행렬을 벌이고 있다. /박근혜 후보 측 제공
박근혜는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을 나설 때 수행했다. 매일 아버지와의 아침식사 때 박근혜는 조간신문을 읽어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박정희의 생각을 물었고 자기 의견을 얘기했다. 주제는 점차 국방·외교로 넓어졌다. 박근혜는 그것을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큰딸이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박정희와 카터는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한국 인권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이때 박근혜는 카터의 부인 로잘린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북한의 위협과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로잘린은 나중에 인터뷰에서 박근혜와 나눈 대화를 남편에게 전달해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박근혜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옷을 갖춰 입고 나간 박근혜에게 김계원 비서실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고 했다. 그 순간 박근혜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했다. 김계원에게 저격 당시 상황을 간단히 들은 박근혜는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김계원은 "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고 답했다.

박근혜 후보(왼쪽에서 둘째)가 지난 1979년 4월 부친인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함께 육사 졸업식에 참석해 졸업생들과 악수하고 있다.
장례식은 9일간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박근혜는 청와대 대접견실에 마련된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았다. 박근혜는 당시를 돌아보며 "이유 없이 팔다리가 부서질 듯 아파 상복을 걷어봤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큰 멍자국이 팔과 어깨, 다리까지 뒤덮었다"고 했다. 청와대 의무실 의사는 "갑자기 너무 큰 충격과 정신적 고통을 당하면 피가 몰려 이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다.

장례식을 치르고 박근혜는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 1979년 11월 27세의 박근혜는 근령·지만 두 동생을 데리고 신당동 사저로 돌아갔다. 트렁크 6개가 이삿짐 전부였다. 박근혜는 "그때부터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 되어야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