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나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나도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내 심장에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애국가가 울려 퍼집니다. 나는 자녀에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애국심이 있어야 한다. 애국심이 없으면 목회자도, 기업인도, 법조인도, 정치인도, 대통령도 되지 마라.” 나는 외칩니다. “나보다 나라가 먼저다.” 역사가 내게 심어준 교훈입니다.
나는 일본의 억압기에 태어났습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해방과 건국의 시기였습니다. 내 나이 열 살 때, 6·25 남침전쟁이 터졌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두 분의 작은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홀로 된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장남인 내 책임이었습니다. 당시 정치인들은 정권 연장에만 몰입했습니다. 사회는 혼란했습니다. 국민들은 가난했습니다. 부정선거와 부정부패가 만연했습니다. 결국 1960년 4월 19일 4·19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제2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학생들의 피가 정권을 바꾼 것입니다. 국민은 기대했습니다.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되겠지.” “나라가 발전하겠지.” “평화통일이 앞당겨지겠지.” “국민 모두가 행복해지겠지.” “먹고 사는 일, 등록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러나 장면 내각의 제2공화국 현실은 혼란, 불안, 데모였습니다. 대학생들은 “김일성대학 학생들과 토론하자”, “김일성을 만나러 북으로 가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5·16이 일어났습니다. 국정의 책임자였던 장면 총리는 그 상황에 대한 정보를 10여 차례나 보고 받거나 입수했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정보였지만, 매번 무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5·16이 일어나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에 숨어버렸습니다.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5월 18일이 되어서야 나타나 하야를 선언했습니다. 국가에 중대한 일이 벌어졌는데,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지도자가 자기 한 몸 살겠다고 숨어버렸습니다. 1961년 대한민국 국민은 그런 정부, 그런 정치 하에 있었습니다. 만약 5월 16일 북한 공산당이 또 다시 침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내각제 정치에서 상징적 국가 원수였던 윤보선 대통령은 5·16직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나라를 구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총리와 민주당 정권의 무능을 질타하며 5·16을 나라를 구하는 길로 평가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폭로한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도 1961년 6월 14일 ‘코리언 리퍼블릭’지에서 5·16에 대한 견해를 밝혔습니다. 그는 투고의 첫 머리에서 ‘5·16군사혁명은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나는 20세였습니다. 늦깎이 야간 고등학교 3학년이자, 공장생활 3년차였습니다. 시대의 격랑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 날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나로서는 4·19혁명이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5·16도 역사의 필연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2공화국은 민주주의에 실패했습니다. 산업화도 실패했습니다. 최소한 보릿고개라도 넘게 해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역시 실패했습니다.
반면 5·16은 보릿고개를 넘게 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냈습니다. 국민들에게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고, 그 희망이 현실이 되게 했습니다. 5·16은 길을 냈습니다. 굴뚝을 올렸습니다. 해외로 나아갔습니다. 국민들의 마음도 채워주고, 배도 채워주었습니다.
19세기 정치가 W. C. 브란은 말했습니다. “위가 비어가지고는 어느 누구도 애국자가 될 수 없다.”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대통령으로 선출된 드골 장군도 말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다.”
지금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5·16에 대한 평가로 뜨겁습니다. 나도 인정합니다. 5·16에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반면교사로 삼으면 됩니다. 그보다 먼저 5·16이 올 수밖에 없었던 정치 현실과 5·16이 가져온 국민 생활의 변화를 주목했으면 합니다. 나에게 5·16은 필연이자, 변화의 기회였습니다.
이제 내 나이 일흔 살이 넘었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었습니다. 돌아보니 역사는 ‘말쟁이’가 아니라, ‘일쟁이’가 이끌어갑니다. 국민에게 필요한 사람은 ‘선동가’가 아니라, ‘선구자’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대한민국과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지도자가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필자 약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회장 역임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 대표회장 역임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설립자 및 총장
한국효운동단체총연합회 대표회장
(재)성산청소년효재단 이사장
인천순복음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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