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남북한 지배해온 박정희와 김일성
김일성-이승만, 장면 시대엔 남한비해 경제적으로 우위 있었으나...
해방 이후에 남한과 북한을 지배해 온 정치지도자는 박정희와 김일성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박정희는 남한에서 18년간이라는 기간을, 김일성은 북한에서 47년이라는 기간 동안을 통치하였다. 아마도 남한과 북한의 모든 것에 그 두 사람의 냄새가 남아 있고, 그 두 사람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비전과 철학이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1912년생, 박정희는 1917년생이었으니, 김일성이 다섯 살 위였다.
우선 두 사람 사이에서 치사하게 나왔던 것은 김일성이다. 여러 얘기할 것 없이 김일성은 1968년 1월 21일 무장공비(김신조 일당)를 내려 보내 청와대를 습격시켰다. 소위 1.21 사태이다. 그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왜 쳐들어왔냐는 질문에 “청와대 까고 박정희 모가지 떼고...”라고 대답했다. 망설임도 없었다. 세계 역사상 드문 일이었다. 일국의 지도자를 정면으로 습격하여 사살한다는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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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청와대습격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김신조는 생포되었고 나머지 무장공비들은 전원 사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습격사건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박정희와 그가 이끄는 남한에 대해서 김일성이 얼마나 초조해 하고 불안해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1968년의 그 지저분하고 더러운 습격사건을 마지막으로 김일성은 사실상 “국방력에서도 더 이상 박정희와 상대할 수 없다. 무조건 내가 졌다”고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처럼 김일성이 청와대를 까려고 했던 그 날, 박정희는 밤이 새도록 고속도로 그림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믿었던 고속도로의 착공일이 바로 열흘 뒤로 다가왔다면서 그 구상을 그림으로 그려대고 있었던 것이다. 공비 잔당을 소탕하는 총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를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독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육 여사도 만만치 않았다. 육영수 여사는 공부하는 모임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공부모임 중 한 사람이 “청와대를 습격한 야만적인 공격이 있으니 공부 모임을 이번 주에는 연기하는 게 어떠냐”고 묻자 육 여사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미루면 언제 공부하느냐”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공부모임을 가졌다는 것이다. 내외가 정말이 쌍둥이처럼 똑같다고 할 수밖에는 없다.
우리나라 고속도로를 착공한 첫 삽을 뜬 날은 1968. 2. 1.이었다. 장소는 서초구 양재동 지금의 교육문화회관 자리. 그 당시 박정희는 아무 일 없이 태연한 얼굴로 연설을 하고 첫 삽을 떴다. 그처럼 태연자약한 모습을 보고 외교사절들은 혀를 내둘렀다. 온 국민들은 안심했다. 대통령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 실패로 김일성은 이제 박정희에 대한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북한의 경제력이 역전된 시기에 대해서는 1971년이네, 1972년이네, 1974년이네 하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1974년이면 완연히 모든 면에서 남한이 앞서게 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이제 김일성은 마지막 발악을 하게 된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 조총련의 지령을 받은 문세광은 박정희를 저격하였으나 암살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암살에 실패한 분풀이였을까?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꼿꼿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대통령에 대한 저격 장면이 모든 국민들에게 생생하게 화면으로 생중계되었다. 허둥대면서 제 살길 바빴던 장관들의 모습과 단정하게 앉아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육영수 여사의 모습이 중계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대통령은 다시 연설대 앞에 섰다. 그리고 연설을 이어갔다. 어디까지 연설했는지를 명백히 기억했고 거기서부터 연설을 이어갔던 것이다. 전 국민은 지도자의 참된 모습을 보았다. “독한 놈”이라고도 하고 “모진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국민들은 위기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빳빳하게 연설을 마친 대통령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북한과 대결해서는 절대로 지지는 않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대통령 암살 미수. 육 여사의 서거에 묻혀서 아직도 그날의 박대통령의 연설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않다. 그 연설내용을 보면 김일성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치사하고 사악한 인간인가를 다시 알아볼 수 있다. 박대통령은 그 연설에서 평화통일 3원칙을 천명하였다. 간단하게 언급하면 첫째, 남북한의 상호불가침협정, 둘째, 건설적이고 개방적인 경쟁, 셋째,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 등 통일에 관한 원칙이었던 것이다.
평화통일의 원칙에 대한 연설 도중에 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기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설을 끝까지 마친 박정희의 모습은 김일성과 비교하여 더욱 빼어난 지도자의 모습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1974년 이후 김일성은 박정희를 정면으로 상대해서 이길 수 없다는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시 간접침략의 방법으로 바꾸었다. 박정희를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려는 세력에 대해서 자금을 지원하고 여러 방면으로 지원하는 방법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더러운 방법도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박정희는 1978년에 국산 미사일을 개발하였다. 굳이 직접 전쟁을 하지 않아도 평양을 때릴 수 있는 위력을 갖춘 미사일의 개발로 북한은 경제력에서도, 군사력에서도 남한에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 차이는 너무도 엄청나게 벌어져 있다. 그러나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일으켰을 당시인 1961년에는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절대 우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전기도 다섯 배가 많았고 석탄생산량도 그 정도로 차이가 났다. 국민소득도 두 배 반이 넘었다. 심지어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하여 쌀을 주겠다고 하면서 허풍을 떨던 적도 있었다. 박정희는 그 순간 얼마나 이를 갈았겠는가? 다시는 저따위 허풍을 떨지 못하도록 하겠다면서 그는 와신상담하였던 것이다.
김일성은 이승만, 장면 시대에는 남한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나 결국 박정희에게는 지고 말았다. 그 뒤로 북한은 가난과 독재로 저주받은 공간이 되고 말았다. 남한은 한강의 기적으로 세계를 향해 나갔다. 쇄국주의의 감옥에 갇힌 북한과 창공을 훨훨 날아다는 개방을 택한 남한의 차이는 이제 흡수통일의 날짜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inbong1953@hanmail.net
*필자/정인봉.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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