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의 18년은 ‘위로부터의 혁명’ 2) 이 진행된 기간이었다. 미국의 계간지 ‘포린 어페어즈(1961년 10월호)’는 5.16 군사혁명까지의 한국을 주저 없이 ‘한국에서의 실패’라고 명명했다.
‘실업자도 노동인구의 25%, 국민 1인당 GNP는 1백 달러를 밑돌며 전기출력은 멕시코의 6분의 1, 수출은 2천만 달러, 그러므로 남한의 경제적 기적 가능성은 제로다.’라며 ‘북한보다 뒤떨어진 한국’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5년 후, 남북은 역전됐다.
혁명가 박정희가 몰아친 결과다. 엘렌 K. 트림버거는 영국, 프랑스 등에서 발생한 전형적인 시민·노동자의 폭력적 ‘아래로부터의 혁명’과 대비하여 일본의 명치유신(1868년), 터키의 케말 파샤의 혁명(1923년) 등을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명쾌하게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초법규적 정치권력의 접수와 변화의 주도(혁명)는 구체제의 군부와 관료들에 의하여 조직되고 유도된다. 그때 대중의 참가는 거의 볼 수 없다.
초법규적 혁명행동을 취하는 군부의 움직임은 대중의 동향과는 무관하며 때로는 양자가 적대적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5·16혁명과 그 뒤의 박정희 정치 18년간은 트림버거가 말한 ‘위로부터의 혁명’ 바로 그것이었다. 혁명 당시 박정희 의장은 ‘왜 혁명이 필요했었는가’라고 자문하고 ‘나라가 빈곤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5·16혁명 당시 한국은 半독립국가, 半식민지국가와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61년 한국의 재정자립도는 39.2%, 국방비는 겨우 4.9%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한국이 재정·국방비 측면에서 비로소 독립국가의 면모를 확보한 것은 제2차 5개년계획(1967년∼1971년)을 조기 초과달성한 70년도 예산부터였다.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후 10년 만에, 재정자립도 94.5%, 국방비자립도 83.9%라는 기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제적 독립국가 대한민국은 70년대 이후의 얘기다. 그 선두에 박정희가 있었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에즈라 보겔은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도 없다. 박정희는 헌신적이었고 개인적으로 착복하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국가에 일신을 바친 리더였다.”고 단언했다.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박대통령의 청렴 국제투명성 위원회(Transparency International) 와 독일 괴팅겐 대학이 공동으로 조사하여 발표한 2009년도 부패인지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0점 만점에 5.5점을 얻어 조사대상 102개 국가 중에서 39위를 차지하고 있다. OECD 가입국가 중 최하위다.
많은 학자들(Baumal, Murphy, Mauro, Tanzi etc.)이 부패가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현주소-여전히 부패공화국, 이 나라는 어디로 갈 것인가?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7월 1일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취임사에서 ‘빈곤과 부정부패와 공산주의’를 우리의 ‘3대 공적’으로 규정했다. 특히 부정부패는 인간의 양심과 친화력을 마비·저해하는 것으로 보고 부패추방을 유난히 강조했다.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제3공화국의 부패통제는 커다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는 평가다. 이 시기에는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국에서 많은 외자를 도입하였고, 국내산업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당 또는 정치인과 정경유착이 심화된 시기였다.
4대 의혹사건(일제 새나라 승용차의 면세도입, 증권파동, 워커힐 공사비 횡령, 빠찡코 수입에 따른 사건), 밀가루, 설탕, 시멘트 등을 특정업자들이 고시가격을 위반하면서 막대한 폭리를 취하도록 묵인한 3분 폭리사건, 사카린 밀수사건 등이 대표적인 비리사건이다. 제4공화국(1975-1979)에서는 서정쇄신이란 이름 하에 공무원의 부정부패와 부조리를 제거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서정쇄신을 두 가지 의미로 정의했다.
첫째, 공무원의 부조리를 뿌리 뽑고, 국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관 기강 확립’을 뜻했다. 둘째, 넓은 의미로 사회정화운동이요, 건전하고 명랑한 국민정신을 진작시키는 정신개혁운동을 의미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4공화국 역시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박정희 개인에겐 ‘부패’가 없었다. 이것이 ‘위로부터의 혁명’이 가능했던 원동력이었다. 박대통령 사후,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본인 또는 직계가족이 ‘부정’했고 ‘부패’해서 나라전체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경제규모 11위이지만 부끄럽게도 부패인지지수는 39위인 대한민국. 이 나라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려면, 무엇보다 최고 지도자가 청렴해야 한다.
지금, 전국에 수많은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4대강 사업을 두고도, ‘워터(Water)게이트’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께서 부디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시길 바란다. 그의 사전에도 ‘부패’라는 단어는 없기를.
박정희 대통령의 사전처럼.
1) 윤창중 논설위원, 문화일보 ‘오후여담’ 2009년 2월 6일자 인용 2) 혁명의 다양한 정의 - 트림버거(Ellen K. Trimberger): ˜혁명이란 구체제의 지배적인 사회그룹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붕괴시키고 중앙국가기구를 불법적으로 장악하는 것˜
- 스카치폴(Theda Skocpol): ˜급격한 정치구조의 변혁을 통해서 그사회의 기존 제도나 계급구조까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시키는 현상˜
- 윌호이트(Fred Willhoite): ˜갑작스럽고 거대한 변동이 비합법적으로
전개되어 기존의 지배체제를 몰락시켜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변혁˜ 3) 강성남, 『관료부패의 통제전략』, “역대정부의 부패통제정책”
,장원출판사, 1999 필자약력 59년 서울생.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서강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수료 (주)소셜뉴스 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