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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성씨의 역사

동 아 2008. 7. 29. 10:46
우리 나라의 성씨의 역사


1. 성씨(姓氏)의 의의(意義)

 

 혈연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우리 민족은 어느 누구나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한 자신의 성씨를 갖고 있으며, 각 성씨 별로 씨족의 역사를 창조 서로 융화하며 협동, 발전하여 왔다. 특히 조상 숭배 사상과 애족 사상이 강한 우리들은 성씨를 통해 선조들의 여운을 느끼고, 면면히 내려오는 가통(家統)의 맥락을 더듬으며 조상의 얼과 체취를 느끼는 동시에 가문에 대한 강한 긍지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씨의 성장 과정은 문명의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역할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다.


2. 성씨의 유래(由來)

 

 성씨의 발생 근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중국 성씨 제도의 영향을 받아 고조선 시대에 왕족(王族)에부터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고대 씨족사회로 접어들면서 그 집단을 통솔하는 지배자가 나타나는데, 통솔에 필요한 정치적 기능을 부여함에 있어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 성(姓)으로 나타나고, 점차적으로 지방 세력이 중앙 귀족화 되면서 다수의 부족을 통솔하기 위한 칭호이며, 정치적 신분을 표시하는 중요한 의미로 나타났다. 따라서 성은 초기에 왕실이나 귀족에서만 국한되어 사용하다가, 국가에 공이 큰 공신들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사는 지역이나 이나 강․산의 명칭을 따라 사성(賜姓, 임금이 성을 내려주는 것)을 하면서 확대되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의 성씨 사용은 과거 제도가 발달되는 고려 문종(1047) 이후에서부터 보편화되었으며, 상민(常民)과 노비(奴婢)를 포함해 모두가 성을 갖게 된 것은 조선말 개혁 정치가 시행되면서부터이다.


3. 성씨의 득성(得姓) 과정(過程)

 

 <삼국사기> 제13권 고구려 본기(本紀)1에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를 건국하고, 고(高)씨를 자신의 성으로 하였으며, 건국 공신인 재사(再思)에게는 극(克)씨를, 무골(武骨)에게는 중실(仲室)씨를, 묵거에게는 산실(山室)시를 사성(賜姓)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제23권 백제 본기1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溫祖)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부여(扶餘)씨로 하였으며,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기원전 57년 양산(陽山) 기슭 나정(蘿井)옆에 있는 숲 속에서 표주박 같은 커다란 알에서 탄생했다 하여, 표주박 박(朴)씨를 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는 65년 탈해왕 9년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 속에서 금함(金函)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김(金)씨라 하였으며, 우리 김해김씨의 시조대왕도 42년(신라 유리왕 19년) 금관국(金官國) 북쪽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온 6개의 황금 알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제1권 신라 본기에는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32년)에 6부를 개정하여 알천 양산촌장 알평에게는 이(李)씨를,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장 소벌도리에게는 최(崔)씨를,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본피부)장 지백호에게는 정(鄭)씨를,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한기부) 장기타에게는 배(裵)씨를,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장 호진(虎珍)에게는 설(薛)씨를 사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의 <백제열전(百濟列傳)>에 보면 사, 연, 예, 직, 국, 묘씨 등 8대성이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시조대왕의 두 아들이 어머님이신 아유타국(阿踰他國)공주 허황후의 성씨를 따서 허(許)씨라 하였고, 고려 왕건은 고려 건국 개국공신인 홍술(弘述)에게 홍(洪)씨를, 삼능(三能)에게 신(申)씨를 복사귀(卜沙貴)에게는 복(卜)씨를 사성하고 백옥삼에 사관하여 각각 흥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귀화(歸化)하여 성을 얻었는데, 주로 중국 계통이 많았다. 괴산점씨(槐山占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 우록(友鹿)계는 일본 계통이고, 화산이씨(花山李氏)는 안남(安南)계통, 연안인(延安印氏)씨는 몽고(蒙古)계, 덕수장씨(德水張氏)는 아랍계이며, 태씨(太氏)의 일부는 발해(渤海)계통이고, 임천이씨(林川李氏)와 경주설씨(慶州)는 위글계통이다. 흥미있는 사실은 충주어씨(忠州魚氏)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원래 지씨(池氏)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체모(體貌)가 기이하고 겨드랑이 밑에 비늘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친히 불러, 보고 나서 어씨(魚氏)로 사성했다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목천현 성씨조(木川縣姓氏條)에 보면, 태조가 고려를 건국한 후 목천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태주의 미움을 사서, 각기 우(牛, 소)․마(馬, 말)․상(象, 코끼리)․장(獐, 노루)․돈(豚, 돼지)씨 등의 짐승 이름으로 사성했는데, 후에 우, 상, 돈, 장씨 등으로 변성(變姓)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성씨의 변천 과정

 

 성씨의 수와 종류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 역사의 흥망성쇠>에는 265성이 기록되어 있고, 조선 영조 때 도곡 이의현이 지은 <도곡총설>에는 298성이, 조선 정조 때 아정 이덕무가 쓴 <앙엽기>에는 486성이, 영조 46년에 편찬되어 정조 6년에 증보(增補)를 시작한 <증보문헌비고>에는 조선초에 무려 4,296성이었던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 289성으로 줄어들었으며, 뒤에 다시 496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성씨에 관한 문헌으로는 <동국여지승람>과 양성지의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조중운의 <씨족원류(氏族遠流)>, 정시술의 <제성보> 등이 있었다.

 

 근대에 들어와서, 1930년 총독부 국세조사에는 250성으로 조사됐고, 1934년 중추원(中樞院)에서 펴낸 <조선의 성명 씨족에 관한 연구 조사>에는 326성으로 나타났다. 또한 1985년 경제기획원에서는 본관별 분류를 처음으로 시도하여 다각적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하였다. 이와 같이 시대별 도는 자료별 차이가 큰 것은 대개 실제 조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옛 문헌에 산재해 잇는 것을 조사한 것이기 때문이며, 가구주와 호적별의 조사 차이로 나타났다. 1975년도 인구 조사에 의한 성씨 분포도를 살펴보면, 김씨가 전체 인구의 21.9%, 이씨가 14.9% ,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4대성이 총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순위 20위 안에 드는 성이 80%를 차지하고 35위 안의 성이 90%, 90여 개 성이 전체의 99%를 차지하여, 실제적으로 우리 나라에는 249개 성(姓)중에 90여 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 16여 개 성은 총인구의 1%에도 못 미치고, 심지어 비, 선, 간, 응, 포, 방, 은씨 등은 전국을 통하여 1가구 밖에 되지 않는다.


5. 본관(本貫)의 종류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가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계통(系統)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동족 여부를 가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이다. 본관이란 본(本)․관향(貫鄕) 또는 관(貫)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관(貫)은 돈을 말하는 것으로 돈을 한 줄에 꿰어 묶어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친족(親族)이란 서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며, 여기에 더 나아가 본적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시조(始祖)나 중시조(中始祖)의 출신지 혹은 정착지를 근거로 호칭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봉군(封君, 고려 때 종 1품, 조선 때 2품 이상의 공로자에게 주는 작위) 칭호를 따라 정하는 경우, 그리고 서씨와 같이 임금이 공신(功臣)이나 귀화인(歸化人)들에게 특별히 하사하는 경우가 잇는데 이를 사관이라고 한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은 곡성 사람이었지만, 고려 태조와 함께 평산(平山)으로 놀러가 그곳이 좋았으므로 평산을 본관으로 하사 받았으며, 하동 쌍계사 비문에 진감선사(眞鑑禪師)의 본관이 황룡사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선사가 황룡사 출신이라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따라서 성씨만을 같다고 해서 전부 같은 혈족이 아니며, 본관까지 같아야 같은 혈족(血族)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성씨(姓氏)와 본관(本貫)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1) 동족(同族) 동본(同本)의 동성(同姓)인데, 근친혼의 불합리성과 윤리적 가치관 때문에 혼인을 절대 금지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많은 사회적 문제가 제기되자 점차 해소시키고 있는 중이다.

 

 (2) 이족(異族) 동본(同本)의 동성(同姓) 관계인데, 이는 성과 본이 같지만, 그 근원은 전혀 달라 사실상 혈통 문제가 전혀 없다. 예를 들어 남양 홍씨는 당홍(당나라부터 온 홍은열을 시조로 함)과 토홍(흥선행을 시조로 함)으로 구분되어, 전혀 공통점이 없이 계통을 달리하는 경우다.

 

 (3) 동족(同族) 이본(異本)의 동성(同姓)인데, 이는 시조도 다르고 본도 다른 경우이다. 예를 들면 강릉 김씨와 광주 김씨는 시조와 본은 다르지만 같은 김알지 계통이며, 고부 최씨와 경주 최씨도 마찬가지로 시조와 본을 달리하지만 같은 최치원 계통이이다.

 

 (4) 이족(異族) 이본(異本)의 동성(同姓) 관계인데, 이는 대성(大姓)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한 예로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 등과 같은 성을 쓰면서도 조상이 달라 아무런 계통 관계가 없는 것이다.

 

 (5) 동족(同族) 동본(同本) 이성(異姓)인데, 이는 조상과 본을 같이 하면서도 성씨만을 다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예로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경우인데, 같은 왕의 후손으로서 성만 달리하므로 혼인이 금지되어 있다.

 

 (6) 이족(異族)의 동본(同本) 이성(異姓)인데 이런 경우는 허다하다. 예를 들어 경주 이씨와 경주 김씨․경주 손씨, 그리고 안동 강씨와 안동 권씨, 안동 김씨 등의 경우이다.

 

 아울러 우리 나라 성씨에 나타난 본관의 수를 살펴보면, <동국만성보>에 김씨가 120본, 이씨가 116본, 박씨가 51본, 최씨가 43본, 정씨가 35본 등으로 나타나 있다. 1930년 국세조사의 기록에 보면 김씨가 85본, 이씨가 103본, 박씨 34본, 정씨가 35본 등으로 되어있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는 같은 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동족 부락이 있었는데, 이들은 문벌을 소중히 여기고 자치적으로 상호 협동하여 집안 일을 해결해나가는 특이한 사회 조직의 한 형태를 이룬다. 수많은 본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분파를 지양하고 한 민족의 핏줄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동족동본의식으로 5천 년 역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었다.


6. 본관의 의의(意義)

 

 본관은 본(本), 관향(貫鄕), 관적(貫籍), 씨관(氏貫), 족본(族本), 향관 (鄕貫) 등 여러 가지로 쓰이지만 본관, 본 또는 관향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원래 본관은 옛날 신분 사회의 유물로서 그 기원은 상당히 오래된다. 성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사람의 출신지로서 신분을 표시했다. 다만 성은 표시하지 않았지만 이름 위에 반드시 출신지를 밝힌 것이 원초적 의미에서 본관을 뜻한 것이라면 우리 나라에서는 성보다 본관이 먼저 생겼던지 성보다 본관을 더욱 중요시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출신지가 성과 결합하여 같은 씨족을 구별하는 표시로서 오늘날과 같은 본관으로 굳어진 것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원래 같은 성씨라 할 지라도 각 성(姓)안에는 여러 친족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 각각 같은 성을 가진 중앙 귀족과 유대를 맺고 있었는데 신라 말기 골품제도가 무너지면서 이러한 유대 관계가 끊어져 지방 친족 공동체들이 각기 흩어져 자기네 직계 선조를 시조로 내세워 본관을 달리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곧 성이 나누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예를 경주 김씨나 경주 박씨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경주 김씨에서는 나주 김, 의성 김, 언양 김, 삼척 김, 강릉 김, 울산 김, 광산 김, 안동 김 등으로 나누어졌고, 박씨는 밀양 박, 고령 박, 함양 박, 죽산 박, 성산 박, 전주 박, 순천 박, 월성 박 등으로 본관이 나누어졌으며 여기서 다시 여러 본관으로 갈리게 되었다.

 

 고려 초에는 성(姓)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 할 수 없게 되자 조상의 출신지 또는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함으로써 동족의 표시로 삼게된 것이다. 그리하여 파계(派系)는 각기 달라도 같은 본관만을 가려서 동족이라 했으며 본관이 만약 다른 고을이 면 비록 성이 같더라도 조상이 다르기 때문에 동족이라 하지 않았다. 이로써 본관의 연원이 상당히 오래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처음엔 본 관이 신분을 표시하는 도구이어서 선비들 사이에서만 사용되었으나 성 이 널리 보급되면서 일반 서민들도 본관을 표시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천민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였다. 성과 본관이 결합된 유형은 다음과 같다. 동족(同族)의 동성 동본(同姓同本) 동족으로서 성과 본관이 같은 경우로 시조를 같이하는 동족은 동성 동본이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동족(同族)의 동성 이본(同姓異本) 성은 같고 본은 다르면서 시조를 같이하는 경우로 경주 김, 광산 김, 강릉 김씨 등은 본관은 다르지만 김알지에 연원을 두고 있어 동족이라 할 수 있다.

 

 동족(同族)의 이성 동본(異姓同本) 원래 동족이지만 사성(賜姓)이나 그 밖의 이유로 성을 달리하는 경우이다. 우리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같은 시조대왕 후손이나 성을 달리하는 경우이다. 동족(同族)의 이성 이본(異姓異本) 동족 또는 연원을 같이 하면서 성과 본관을 달리하는 경우로 김해 김씨와 양천 허, 인천 이씨가 그 예이다. 이족(異族)의 동성 동본(同姓同本) 동족이 아니면서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로 우리 시조대왕계의 김해 김씨와 일본계로 임진왜란 때 귀화한 김충선계 김해 김씨, 남양 홍씨의 당홍계와 도홍계가 그 예이다. 이족(異族)의 동성 이본(同姓異本) 성은 같으면서 본관을 달리하는 이족을 의미한다. 그 예로 경주이씨 와 전주이씨, 안동장씨와 덕수이씨가 그것이다. 이족(異族)의 이성 동본(異姓同本) 성이 다른 이족이면서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로 경주 이씨와 경주 김씨, 청주 한씨와 청주 이씨 등이 그 예로 이들은 다만 시조가 동향일 뿐이다.


7. 이름과 항렬(行列)에 대해

 

 형제들은 형제들 나름대로의 돌림자를 갖고 있고, 아버지나 할아버지들도 그들의 돌림자를 갖고 있으며, 같은 세계(世系) 상에 있으면 촌수와 상관없이 같은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어 형제임을 알 수 있는데, 이렇듯 혈족의 방계(傍系)에 속한 대수를 나타내는 돌림자가 항렬(行列) 자이다.

 

 항렬은 장손 계통일수록 낮고 지손(支孫) 계통은 높은 것이 일반적인데, 장손 계통은 지손 계통보다 세대 교체가 빠르기 때문이다. 같은 형제라도 일찍 태어나서 장가를 가고 막내는 나이 차이 때문에 늦게 결혼하게 돼 심하면 맏이가 손자를 볼 때 막내가 결혼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장손 계통의 항렬자의 사용 진도가 그 만큼 앞당겨짐으로 항렬이 자연히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항렬은 단순히 이름의 돌림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몇 대 손이 되는가를 표시하는 도구가 된다. 집안에 따라서는 항렬을 나이보다 우선시키고 있어 나이에 관계없이 항렬이 높은 사람에게 윗사람 대접을 하고 항렬이 낮은 사람에게는 말을 놓는 경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인들이 정해놓은 항렬자는 원칙적으로 중간에 바꿀 수 없다. 다만 글자가 조상의 이름에 저촉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바뀌는 수가 있었다. 또 옛날 전제 정치 하에서는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아예 족보에서 빼버리든지 항렬자를 바꾸기도 했었다. 갑신정변의 주도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을 주축으로 한 개화당의 혁명이 3일 천하로 끝나면서 그들은 사대당(事大黨)인 민정권(閔政權)에 의해 역적으로 몰리어 안동 김씨인 김옥균의 균자 항렬자를 규로, 남양 홍씨인 홍영식의 식자 항렬자를 로, 반남 박씨인 박영효의 영자 항렬자를 승으로, 달성 서씨인 서광범과 서재필의 광자와 재자 항렬을 병과 정으로 각각 바꾸었다


8. 족보의 유래

 

 왕실(王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시작된 족보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족보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중국 한나라 시대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옛 문헌에 의 하면 후한(後漢)이후 중앙 또는 지방에서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는 씨 족이 형성됨으로 문벌과 가풍을 중요시하게 되어 족보와 비슷한 것이 생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량과(賢良科)라는 벼슬에 추천되기도 했다. 위(魏)나라 때는 더욱 발달되어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위나라의 조조(曹操)가 실시한 제도로 각 주, 군, 현에 지방장관과는 별도로 중정 (中正)을 두어 그 중정이 지방의 인사를 덕행, 재능에 따라 9등급으로 분리 판정하여 중앙의 이부(吏部)에 추천하는 제도)을 제정하여 관리를 등용하였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중국에서 420년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강남의 송나라와 대립한 때로부터 진나라를 정복할 때까지의 시대)에 와서는 하나의 학문으로 보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남조(南朝)의 제(薺)나라 사람인 가희경(賈希鏡)을 보학의 선구자라고 하는데, 그의 3대가 보학에 밝았다고 한다. 그의 조부 가필지(賈弼之)는 각 성씨의 족보를 모아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그의 아버지 가비지(賈匪之)도 계속 연구하였다. 가희경은 중국 전 영토의 각 사족(士族)의 족보를 총망라하여 100질 700백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만들었다. 이것이 족보의 시초로서 가장 정확한 계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족보는 고려 때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고려 중엽 이후에 나온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임경숙(任景肅)의 선원록(璿源錄)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왕실의 친척인 종자(宗子), 종녀(宗女)까지도 기입되어 족보의 형태를 처음으로 갖추었다.

 

 이후 고려사회는 문벌유족(門閥遺族)의 형성으로 족보가 유행하였고 신분에 따라 사회 활동 및 출세에 제한을 받았으며 문벌이 낮은 가문과는 혼인조차 하지 않았었다. 고려시대의 족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문벌유족들의 족보는 세계, 항렬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계보의 관념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종 때에는 성씨, 혈족의 계통을 기록한 문헌을 관에 비치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밝혔으며 보학이 번창하던 송나라와도 교류를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족보의 편성 간행이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는 조선이 문벌유족 정치의 형태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유교(儒敎)를 국시(國是)로 삼았기 때문에 각 문벌유족들은 문벌을 지키기 위한 방안으로 성족(姓族) 파(派)별로 가승(家乘)을 명확히 하는 움직임을 활발히 진행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동성 동본의 혈족 전부를 체계적으로 수록한 세보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400년대로 안동권(安東權)씨의 성화보(成化譜) 와 문화류(文化柳)씨의 가정보(嘉靖譜)를 꼽을 수 있다. 이중 성화보는 1476년(성종때)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중간본만 전해지고 있다. 문화류씨의 가정보는 1562년에 간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완벽한 체계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외손까지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후일 여러 족보를 만드는데 참고 자료가 되었다. 이와 같은 족보가 출현하기 전에는 가첩(家牒)이나 가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 무렵만 해도 몇몇 유력한 씨족만이 지녔던 족보가 일반화되기는 선조 때 이르러 당쟁이 차츰 가열되고 문벌간의 대결 양상이 점차 심화돼 각 유족의 일대를 공고히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이다.

 

 그 외에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격심한 전란을 치르면서 종래의 엄격한 신분제도가 붕괴된 것이 족보의 발달을 촉진한 요인이 되었다. 신분제도가 해이해짐에 따라 양반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 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혈족인양 행세하게 되자 동족(同族)의 명부라고 할 족보를 만들어 다른 혈족이 혈통을 사칭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일제 치하에서는 이 민족의 지배 때문에 학문이나 일반 사회 문제 연구보다는 동족 결속에 관심이 쏠리게 되어 족보에 대한 관심 이 높아지기도 했었다. 이 당시 국내에서 발생되던 각종 출판물 중에 족보 발행이 1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는 역사, 경제 문예, 사상을 연구하는 것보다 일문일족(一門一族)의 기록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의 취락 (朝鮮의 聚落)이라는 책의 후편을 보면 그 당시 한국에 있어서의 한국인이 발행한 단행본 출판허가 건수는 1933년에 861건, 1934년에 1,090 건이었는데 족보의 발행 건수가 1932년에 137건, 1933년에 151건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