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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이후 곳곳에 지어진 많은 절들은 우리의 역사와 지금까지 함께 해 왔습니다. 지금도 역사적인 많은 사료가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절은 불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아 불도를 닦고 불법을 널리 전파하는 장소입니다. 절구경을 떠나기 앞서 몇 가지 용어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절을 한자로는 사(寺)라 부른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때(漢) 중국을 방문하는 인도승을 머물게 하던 관청이 홍로시(鴻盧侍)라는 관청이 있었는데 후에 관청과 구별하기 위해 '시'를 '사'로 구별해서 부르게 되었다. 우리말로 '절'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질 때 아도 화상이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 지냈는데 '모례'는 우리말로 '털례'이고 '털'이 '덜'로 바뀌고 다시 '절'로 되었다는 설과 절을 많이 하는 곳이기 때문에 '절'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
<우리 나라의 삼보사찰>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 하여 통도사와 해인사, 송광사를 신앙의 근본이 되는 사찰로 존중하여 왔다.
첫 째로 불보(佛寶)사찰 통도사는 신라시대 자장스님에 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적멸보궁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진신을 모신 사찰이라는 뜻에서 불보사찰이라고 하는 것이다.
두 째로 법보(法寶)사찰 해인사는 세계의 문화유산인 고려 목판팔만대장경을 봉안하고 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셨다는 의미에서 법보사찰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세 째로 승보(僧寶)사찰인 송광사는 고려시대 이후 16국사가 배출된 승가의 대표적 사찰로써 우리나라 최고의 승보사찰로 숭앙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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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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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승려들이 사는 집으로 불사(佛事)를 관리하고 수행자들의 의식주를 뒷받침 해주는 생활공간이며 휴식처이다. 즉 승려들이 먹고 자고 빨래하고 목욕하고 배설하는 따위의 일상 생활을 하는 집을 요사(寮舍)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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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 람 |
범어의 Sangarama에서 비롯된 말로써 많은 승려들이 모여 불도를 수행하는 장소, 곧 중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를 한역하면 승원이 된다. 가람배치의 발전 과정은 처음에 승방(승원)이 생겼고 다음에 탑, 그 후에 불당이 세워졌다. (승방→탑→불당) ※ 그런 측면에서 가람의 구성을 크게 보면 예배원과 요사(승원, 승방)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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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람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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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이후의 우리 나라 역사를 연구할 때 가람 배치는 중요한 시간적인 지표가 되고 있다. 그것은 각 시대마다 가람배치 형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남아있는 절터에서 발굴된 유물의 시기를 가람 배치 형석에 견주어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가람배치의 큰 변화는 금당과 탑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불교 초기에도 그랬지만 삼국시대 초기에는 주 경배 대상이 탑(목탑)이었으나 차츰 탑에서 금당으로 중심 축이 바뀌면서 조선시대에 오면 탑은 단순히 장식적인 구조물로 되어 버린다. 각 시대의 가람 배치 모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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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고구려 사찰 중앙에 8각 목탑을 세우고 그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 금당을 세채 배치하고 남쪽에 떨어져서 문을, 그리고 북쪽 금당 뒤편에 강강과 부속 건물을 세웠다(이상 평야 청암리 사지 상오리 사지, 정릉사지)
나. 백제, 신라의 사찰 탑과 금당 및 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열한 형식이었고 앞면의 중문(또는 남문)으로부터 강당까지를 대체로 축선에 맞추어 배치하고 회랑을 둘러서 성역을 이루었다. 또 회랑 밖 강당 뒤쪽과 좌우 옆 쪽에 승방 등의 부속 건물을 세워 성역과 일반 사역을 구분하였다. 후기로 가면서 목탑은 석탑으로 바뀌고 탑 뒤에 금당이 한 채(一金堂)로부터 나란히 세채가 들어서기도 한다.(황룡사 창건가람)
다. 통일신라 이후의 사찰 강강 좌우에 설치되던 건물은 점차 퇴화되어 없어지고 남쪽 전면 회랑 좌우에 종루나 경루 같은 별도의 건물이 생겼으며 금당 좌우에 연결된 익당이 생격서 예배 공간과 설법 공간이 구획되었다.
라. 고려시대의 사찰 개성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새로운 절이 많이 창건되었다. 이때부터 강당과 승방, 요사 등의 건물이 금당 전면으로 배치되는 경향을 보인다. 여러 사람이 출입하는 설법과 유숙의 장소는 초입에 두고 법당을 깊숙이 배치함으로써 경건하고 엄숙한 성역을 이룰 수 있었다.
마. 조선시대의 사찰 불상이 봉안된 법당이 예배 대상의 중심이 되어 탑의 규모는 약화되었다. 따라서 탑은 금당의 중심축 밖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사원 성역 외곽으로 밀려나서 사찰의 한 장식품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후 중창된 사찰엔 거의가 금당의 전면 좌우에 승방용에 해당하는 당우(堂宇)가 놓이고 전정(前庭)앞에는 누각(강당을 겸함) 천왕문, 금강문, 일주문 등의 순서로 배치된다. 옛 가람의 회랑을 대신하여 선당과 승당, 누등으로 짜여진 중정에서 모든 봉불의례가 행해지며 절이 들어선 골짜기 전체가 사찰의 경내로 되어 가는 경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