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5.16 무혈군사혁명

동 아 2008. 5. 16. 07:18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게 된 근본원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자유당 정권의 부정 부패

      와 제2공화국의 무능에 있었다.

       

      4.19의거 후 성립한 제2공화국의 민주당 정권은 당시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무질서를 안정시켜

      반공, 국방, 안보 체제를 확립하여야 했으나, 집권 초부터 당내 신.구파가 파쟁을 일으켜 정치적

      혼란을 가져오는 등 국민의 기대를 외면하고 말았다.

      더욱이 크고 작은 시위가 잇달아 일어나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으나, 민주당 정부는 사회 질서를

      확보, 유지할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일단의 군인들이, 국가를 위기로부터 구하고 부정부패를 추방한다는 명분 아래, 1961년 5

      16일 새벽을 기해 행동을 개시하였다.

       

      체념상태에 있던 일반 국민이나 무기력했던 장면 정부, 군부 내 반대세력, 그리고 당시 한국

      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던 미국정부까지 그 어디서도 군사혁명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나 저항이

      지 않았는데, 그것은 건국후 민간세력이 주도한 13년동안의 국가건설 노력이 실패했다는 사실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더우기 일반 국민들은 연도에 나와 박수를 치며 환

      으니 이는 4·19 봉기와 5·16혁명은 역사적인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에서 근대적 힘을 대변한 두 세력, 즉 학생과 군인들이 연달아 주체를 달리하는 봉

      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무력과 조직력이 결여되어 봉기로 끝나고 말았지만 군인들은 달랐으며 으며, 

      학생들은 즉흥적이고 비체계적이었던 반면, 군인들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이었으므로 목적을 달성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면의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린 혁명군은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방송을 통해 이 같은 사실

      을 국내외에 알렸다. 이어 국회를 해산하고 3권을 혁명위원회에 귀속시키는 동시에, 국민들에게

      6개 항목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공약의 골자는 반공 태세 강화, 자유 우방과의 유대 강화, 구악 일소, 자주 경제 재건, 통일을 위한

      실력 배양, 혁명 수행 후 본연의 임무에의 복귀 등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이어 전국에 비상 계

      엄령을 선포하고, 그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였다.

       

      혁명군은 먼저 반공을 국시로 정하여 승공태세를 정비하고, 사회기풍을 쇄신하는 데 힘썼다.

      편, 폭력배의 소탕, 밀수품의 단절, 농어촌 고리채의 정리, 부실 기업 및 사학의 정비 등 사회

      모순과 구악을 과감히 제거하였으며, 드디어 정치가 국민들의 기대에 실망을 주지 않은 최초의

      선례를 남기게 되었다.

       

      해방 후 한국의 군은 6·25 전쟁을 치르면서 급속히 성장하여, 50년 10만 규모에서 56년 70만 대군

      으로 변했다. 이러한 양적 팽창보다도 정치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진 것은 군부의 급속한 제도적,

      기술적, 조직적 발전이었다. 미국의 막대한 군사 원조와 훈련 지도로 당시 한국에서 가장 근대화

      하고 서구화한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자연히 부패하고 무능한 민간 엘리트에 대한 불신감이 조장

      되고, 진정한 국가 발전을 담당할 세력은 자신들이라는 일종의 소명의식이 싹 텄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국민들 역시 이들을 적극 지지하여 민,관,군이 삼위일체가 되어 번영의 초석을 다지는

      희망의 한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오늘에 사는 우리 세대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느냐

      고 물을 때 우리는 서슴지 않고 조국 근대화의 신앙을 가지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떳떳하게 대답할 수

      게 합시다.』

       

      유사이래 처음으로 국민통합을 이룬 위대한 지도자를 맞이한 한반도는 일 하고 또 일 했다.

      일이란 희망이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중단없는 전진을 외치며 앞만 보고 가다가, 그 말 많은 유신체제를 필요로 하기에 이른다.

       

      말도 많은 유신헌법.

      유신헌법은 잘된 헌법도 잘못된 헌법도 아닌 그 당시 대한민국에 있었던 헌법일 뿐이다.

      이후에도 세차례나 더 바뀐게 헌법이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바꾸는 것이 헌법이다.

      유신헌법은 우리 국민들의 약92% 투표(율)에 91.5%의 찬성을 얻어 통과된 헌법으로,

      이를 두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 짓은 우리들의 선배인 당시 이 나라 국민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세종대왕에게 아홉명의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두고 지금의 잣대로 손가락질 하는 것

      같은 이치이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  당시 귀족인 3인의 집정관(아르곤)이 국가를 통치하였으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부유해진 평민들이 생기고 이들의 반발을 잠 재우기 위해 그들에게도 참정

      권을 주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수십만명 중 불과 1,2천명 정도였으며, 여자들과 국민들의 대부분인 노예계층

      은 배제되었. 지금의 시각으로는 그게 뭔 민주주의냐고 하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변해 온 것이

      .

       

      대한민국 건국이래 독재는 없었다. 다만 성숙되지 못한 민주주의는 있었지만 -

      지금 역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 말 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세상은 변해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