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국토개조를통해 '선진조국건설'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설계했었던 박정희

동 아 2008. 4. 2. 11:08
국토개조를통해 '선진조국건설'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설계했었던 박정희
임시행정수도에서 국토개조론으로 발전


행정수도 건설구상이 구체화되면서 이 계획은 커다란 질적 변화를 거친다. 단순한 행정수도 건설이 아니라 행정수도 건설을 통해 국토를 완전히 개조하는 거대 프로젝트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전쟁에 대비한 임시행정수도 건설계획이 국토개조계획으로 바뀌는 데는 오원철 당시 경제2수석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오원철은 자신의 손에 행정수도 건설계획이 맡겨지자 바로 이를 2000년대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80년을 고비로 공업화의 양적 기반이 잡혀가고 있는 만큼 80년대는 이를 질적으로 고도화하는 단계로 접어들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획기적인 생산성 향상과 물류비용의 절감, 에너지 효율화를 위해 우리나라 공업구조의 질적 발전을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00년대의 국토구상”으로 나타난다.

오원철의 이같은 구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박정희정권의 최대 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형 경제건설의 실질 설계자였기 때문이다. 수출주도형 경제건설부터 시작해 해외건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에 이르기까지 한국형 경제건설의 고비고비마다 그의 입김과 아이디어, 노력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70년대 중반의 한국경제는 이같은 중화학공업화가 한창 이뤄지던 단계였다. 간간이 에너지파동과 같은 외부적 충격으로 경제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이를 무난히 이겨내고 집중된 정부의 고도성장전략이 빛을 발하던 황금기였다. 국제사회는 최빈국이던 한국의 눈부신 공업화 성공을 경이적인 눈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을 가리켜 제2의 일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일부에서는 경계의 시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2000년대 국토구상의 내용과 사상

오원철은 왜 국토개조구상을 갖게 됐을까. 그는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브리핑 차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국은 수출위주의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저렴한 인건비에서 발생하는 이득(경쟁력)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기업만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전국가·전국토가 합리적으로 동원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될 때 국제경쟁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대부분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외국에서 가져다 이를 가공해 수출하는 공업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수출을 하지 못하면 먹고살 수가 없는 구조다. 바꿔말하면 한국경제는 국제경쟁력을 갖지 않고는 성장이 어려운 것은 물론, 생존조차 보장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 국민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의식주의 대부분, 수출하는 상품의 원료 및 이에 필요한 에너지 대부분을 우리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원료와 에너지를 갖고 얼마나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느냐에 우리 경제의 사활이 걸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임금은 가능한 낮추고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하며 유통 및 운반, 통관과정과 같은 물류 비용은 최대한 줄여야 한다. 또 에너지를 가능한 덜쓰는 생산 및 공업구조로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다.

60년대 공업화의 성공은 주로 낮은 임금에 바탕한 높은 노동생산성에 힘입은 것이다. 당시 가발과 봉제품 같은 경공업제품이 우리 수출의 주종을 이뤘다. 경공업이 주로 10대후반 여공들의 헌신적인 노동력에 힘입은 것이다. 이와는 달리 70년대초 달러벌이의 주(主)수입원이던 해외건설은 한국남성들의 노동력 수출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생활수준의 향상과 후발개도국의 추격 등으로 낮은 임금을 바탕으로 하는 노임위주의 달러벌이와 수출전략은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같은 한계의 탈출구로 모색된 것이 바로 중화학공업화이다. 중화학공업화는 경공업 구조이던 우리나라 공업구조를 중화학공업으로 재편하여 선진국 의존에서 벗어난 독자적 자립경제구조로 만드는 대역사였다.

중화학공업이 비록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건설을 위해 출발했으나 그 추진방법은 민영화와 산업화를 주요전략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연관공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다. 즉 평화시에는 산업기계와 컨테이너 화물선을 만드는 기계공장과 조선소가, 유사시에는 대포와 군함을 만드는 방위산업 시설이 되는 것이다. 비료공장과 화학공장들도 여차하면 화약공장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총기류 생산은 특수강과 정밀기계공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장갑차와 탱크 같은 무기생산은 기계공업을 꽃피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중화학공업에 소요되는 모든 원자재를 국산화하기 위해서는 정유산업과 석유화학공업, 제철산업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중화학공업 추진기획단이 동시에 방위산업을 맡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같은 중화학공업화의 성공으로 한국은 세계적인 공업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방위산업의 육성 자체가 또 결정적으로 전쟁을 막는 구실을 했다. 공산화를 막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도 결코 중화학시설이 있는 나라가 공산화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정희와 오원철이 갖가지 대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 것도 이같은 전략적 관점을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하려던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중도에 포기된 실질적 이유는 한국의 급속한 중공업화 성공에 힘입은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항공모함도 건조할 수 있는 거제의 세계최대 조선소와 원자력발전소까지 만들 수 있는 창원의 기계공단, 각종 중화학시설 등이 공산진영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깨달은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중도에 포기했다는 것이다.

오원철은 한국경제의 기초를 설계한 만큼 한국경제의 약점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경제는 중화학공업화의 기초를 이제 막 완성해 가는 단계였다. 따라서 외형적 모습은 갖췄으나 국제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는 구조적 취약점이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에너지 효율과 수송 하역 통관 등에 따르는 과다한 물류비용의 문제였다.

이것의 해결책은 기술개발과 사회간접자본건설과 같은 인프라 건설뿐이었다. 성(省)에너지·성(省)자원은 기술개발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부분이다. 기술개발은 국가적 지원이 필요한 분야이나 개발의 주체는 개별기업이다. 반면 산업합리화·국토계획과 같은 인프라 건설은 국가만이 할 수 있는 분야다. 오원철이 착안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을 통한 성에너지·성자원적 산업구조를 추구했던 것이다.

오원철은 한반도를 하나의 거대한 유통산업기지로 만들려는 국토개조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의 국토개조계획은 궁극적으로 에너지 절감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오원철은 앞으로 수출산업은 모두 임해지역에 배치하려 했다. 즉 대규모 항만 근처에 수출기지를 건설, 수입된 원료를 통해 제품을 만들어 바로 수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내수용 공장만을 소비지인 대도시에 근접한 내륙공업단지에 입주시켜 생산하게 한다는 구상이다.
한국의 산업구조는 외국으로부터 원료를 들여와 우선 항구 근처의 임해공업단지에서 1차가공을 거쳐 공업용 원료를 생산한 뒤 이를 대도시 부근의 내륙공업단지로 수송하는 구조로 돼 있다. 내륙공업단지에서 이를 가공하여 최종소비제품으로 만든 다음 일부는 내수로 쓰고 대부분은 다시 항구로 보내 수출하는 시스템이다.

물동량 수송 측면에서 보면 수출용 제품에 사용되는 원료와 수출품을 이중으로 내륙수송하는 결과를 빚는다. 즉 수출용 원료가 내륙공단으로 옮겨갔다가 제품으로 만들어진 뒤 다시 항구로 옮겨져 수출되는 것이다. 해외의존도가 80%를넘는 수출의존형 경제구조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비효율을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개별기업이나 제품차원에서도 이같은 구조는 가격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 수송과 물류의 비효율에서 오는 국가경쟁력의 약화는 사활적 문제로 부각된다.

그러나 이같은 공업구조배치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개별공장이나 기업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권 차원에서도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계승될 수 있는 장기적 안목과 계획이 있어야만 근본적 치유가 가능하다.

오원철이 국토개조를 통해 해결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대규모 임해공업기지의 건설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다. 항만을 낀 초대규모 임해공업기지를 건설해 각종 공장을 이곳에 집결시키려 했다. 가공공장을 지어 수입한 원료로 1차 공업원료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최종제품까지 완성하는 일관생산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즉 수출용 상품은 항만을 낀 임해공업지역에서 제품화하여 바로 내다팔 수 있도록 공업구조를 바꾸려 했다. 이렇게 하면 원료와 상품을 내륙수송하는 데 따른 물동량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대신 내수용 상품의 생산은 거점도시 주변에 내륙공단을 만들어 입주시킬 계획이었다. 이 경우도 가능한 물류흐름을 직선화하고 교통의 교차점에 위치하도록 해 에너지를 절약하고 물류비용을 절감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두 개의 초대형 항만 건설계획

오원철은 경제성장에 따라 늘어나는 물동량의 수송을 해상수송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77년 당시 국제화물 수요는 연간 4천1백만t인데 비해 2001년에는 그 10배인 약 4억t 가량으로 늘 것으로 추정됐다. 당시까지 주로 철도와 도로를 통한 수송, 즉 육송(陸送)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해상수송을 통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육상수송은 해상수송에 비해 에너지를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은 물론 도로와 철도건설에 따른 비용도 훨씬 많이 든다. 수송체계를 해상중심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항만의 하역 및 보관시설을 크게 늘릴 필요가 생겨난다. 이를 위해 오원철은 두 개의 초대형 항만을 새로 건설하려 했다.

서산지역과 진해만 일대를 전부 항만으로 만드는 투 포트 시스템을 그는 구상했다. 그 규모는 지금의 부산항보다 최대 10배 크기의 규모였다. 이곳은 우선 10만t급 이상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을 만큼 수심이 깊고 연간 5천만t 이상의 화물의 하역이 가능할 만큼의 배후단지를 확보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앞으로 열릴 대(對)중국 교역에 대비하고 육상교통과 원활한 연계가 이뤄질 수 있는 점 등이 감안돼 선정됐다고 이 작업을 실무적으로 진행했던 정진행 씨(당시 용역회사인 ‘全엔지니어링’의 엔지니어, 현재 대우건설 부사장)는 말했다.

항만개발은 또 기본적으로 임해공업단지와 배후도시를 동시에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됐으며 규모도 기존 항만 중 가장 큰 부산항보다도 우선 4~6배, 장기적으로는 10배까지 확장이 가능할 정도의 초대형 규모로 계획됐다. 산업기지에는 항만뿐 아니라 배후도시 성격의 몇몇 신도시들을 함께 개발하는 것으로 계획이 짜여졌다. 즉 생산시설과 물류기지, 소비 및 주거공간을 함께 갖추는 6~8개의 자족(自足)도시를 항만 배후에 함께 건설하는 형태다. 즉 두 곳의 산업기지에 각각 대규모 공단군(群)과 함께 근로자들이 생활할 수 있는 배후도시를 건설해 각각 4~6백만명의 인구를 새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숫자는 행정수도 수용인구와 함께 2000년까지 늘어나는 인구(1천2백만~1천4백만명)를 신산업기지에서 모두 소화하겠다는 의미다.


중부산업기지

중부산업기지는 행정수도의 관문역할을 하게 될 대규모 항만과 산업기지, 배후도시를 동시에 건설하는 규모로 계획됐다. 4단계로 진행될 배후산업기지의 총면적이 6천2백만평인데 이는 분당 신도시의 10배 규모다. 하역능력 기준으로 봐도 당시 부산항의 4배 규모로 계획됐다. 관계기관의 타당성조사 결과 수심이 18m로, 준설하면 20만t급의 대형선박의 출입도 가능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것으로 나타났다. 이곳의 문제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 항만건설이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으나 네덜란드 기술진의 자문을 구해본 결과 기술적인 진보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답변을 얻었다고 한다.

항만 외에 중부기지는 가로림만이라는 큰 만을 메워 공업단지화하고 주위 야산을 일부 사용하여 3억평에 이르는 공업단지군(群)을 조성하는 산업기지건설이 함께 계획됐다. 이 지역에는 입지선정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철·정유공장·발전소 등을 건설해 중부지역 종합중화학공단으로 개발하려 했다. 공업단지는 산업단지와 함께 중핵도시를 건설하고 근로자와 중산층 위주의 계획도시를 함께 건설해 최대 6백만명의 인구를 유치할 수 있는 규모로 계획됐다.

가로림만은 조력발전소를 만든다고 여러번 논의됐던 곳으로 해당부처에서 건의도 했으나 중부기지건설 구상으로 발전소 건설계획은 취소됐다. 박대통령은 이곳을 현지 답사하고 나서 우선 1차로 제2종합제철 부지로 결정해 진입도로까지 건설했다. 제2종합제철은 용역작업까지 하고 현지사무소까지 건설했으나 그후 광양만으로 옮겨졌다. 중부기지는 행정수도의 관문역할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대중국(당시는 중공)과의 교역에 대비하는 교역항으로 계획됐다.


남부산업기지

경남 고성 안정리 해안에서 진해만 전체를 항만화하려는 계획이 바로 남부산업기지 건설계획이었다. 수심이 최고 22m로 비교적 깊고 거제도가 방파제 역할을 해줘 천혜의 항구라는 것이다. 또 항구의 안벽 길이가 30km를 넘어 부산항의 6배 규모로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30만t급 화물선도 접안할 수 있으며 넓은 야적장을 확보할 수 있다. 50만명이 거주할 수 있는 배후도시 건설도 가능한 것으로 평가됐다.

진해만 전체를 하나의 항구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어 이 구상이 현실화됐을 경우 동북아의 허브항으로 기능할 수 있는 규모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남부기지는 주위에 거제조선기지, 창원공단의 기계공단 등이 입지해 있으므로 제2의 기계공단 건설에 적합한 지역이며 비료·시멘트·석탄·석유 등 대규모 저장 비축시설의 입지로도 적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4개 환상선과 8개 방사축으로 계획된 간선교통망

오원철은 전국의 간선교통망을 4개의 환상선(環狀線)과 8개의 방사선(放射線)으로 연결하려고 계획했다. 남한 전체를 새로 건설될 행정수도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로, 마치 거대한 도시국가 모양으로 만드는 도로망 건설이다.

방사선 간선망은 신(新)수도권을 핵으로 전국의 중핵도시들과 주요산업기지들로 뻗어나가 직접 연결하는 동선(動線)체계를 뜻한다.

방사 1호선은 신수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현재의 경부고속도로 서울­대전구간에 해당된다. 방사 2호선은 신수도와 북평(현재의 동해시)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간선도로다. 이 도로축은 영동권의 충주·영월·삼척 등의 중핵도시들을 연결하고 영동권내 태백지구 등의 산업기지들을 직접 연결하는 산업 대동맥으로 구상됐다.

방사 3호선은 신수도와 대구·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축의 대전­부산구간에 해당된다. 3호선은 영덕과 포항·울산·온산 등 중핵도시들과 대규모 공업지역과도 연결되는 동맥선이다. 방사 4호선은 신수도와 진주·남부기지·거제를 연결하는 간선축으로 남부공업기지를 육성 발전시키기 위한 동선축이다. 방사 5호선은 신수도와 순천·여수를 연결하여 신수도에서 여천·광양 등 공업기지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고 소백산맥에 가려 개발이 소외돼 왔던 내륙지방의 도시들을 중핵 거점도시들로 개발 유도하기 위한 노선이다.

방사 6호선은 신수도와 목포를 연결하는 현재의 호남고속도로 노선이다. 방사 7호선은 신수도와 서해안 군산­비인 공업지역을 연결하는 노선이며, 8호선은 신수도와 중부산업기지를 연결하는 노선을 가르킨다.

환상(環狀)간선은 모두 4개로 구성되는데 우선 신수도 중심에서 반경 30km권을 둘러싸는 광역환상도로가 1호선으로 수도권 주변 중핵 위성도시들을 연결한다. 2호선은 평택­충주­김천­군산­중부기지를 연결하는 순환선으로 중부기지의 산업기지와 대단위 농업기지를 엮는 간선 구실을 하도록 계획됐다. 3호선은 인천­서울­원주­대구­마산­순천­광주를 연결하는 순환선으로 서울과 내륙지방의 각 중핵도시들을 연결하는 환상선으로 계획됐다. 4호선은 동해안의 해안을 따라 속초­강릉­북평­삼척­포항­울산­부산­창원­순천­목포를 연결하는 해안순환선으로 서해 및 남해안의 임해공업단지를 연결하는 산업기지 및 관광을 위한 주동맥 구실을 하도록 구상됐다.

“2000년대 국토구상”은 간선도로망을 건설할 때 기존도로망을 이용할 경우에도 직선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교통용량은 각 지방의 교통량에 따라 도로규모를 정하도록 했으며 기존철도도 그 용량을 감안해 도로용량을 결정토록 했다. 중핵도시를 새로 건설하는 경우 기존 도심을 피하고 인근에 새로운 도시계획하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개발은 기본적으로 공영개발을 통해 개발이득을 환수하여 도시개발 및 도로건설의 재원으로 사용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2시간 이내 수도 도달

이렇게 국토 전체를 신행정수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도시처럼 환상도로망과 직선화된 방사선식 도로망으로 연결시키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오원철 수석은 이렇게 신수도 중심으로 간선도로망을 구축할 경우 경부축과 기존 수도권의 지나친 집중으로 인한 물류비용과 시간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전국 각지에서 수도에 이르는 시간적 거리를 비교해 보면 기존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체계보다는 최대 3분의 1, 대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체계의 2분의 1까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한다. 전국 각지에서 수도권에 진입하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봐야 2시간 반 이내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국을 일일생활권에서 반일생활권으로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전국을 유기적인 동선체계로 연결할 경우 공간적·시간적 거리 단축으로 국민들의 주거개념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으로 “국토구상”은 기대했다. 반드시 도심에서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확산돼 전원주택과 같은 다양한 선진적 주거형태가 일반화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전국 국토공간을 고루 이용하는 데 따른 국토이용의 효율화와 국토균형발전을 촉진하는 기대효과가 있을 것으로 “국토구상”은 밝히고 있다.


자연보전의 구상

“국토구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연보전과 개발에 대한 입장이다. 국토구상은 개발지역은 집중화된 고도개발을 통해 생산성 높은 개발을 추구하되 개발에서 제외된 유보지역은 후손들을 위하여 개발을 철저히 통제하도록 하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수자원보호를 위해 수계(水系) 상류지역은 공장건설을 일체 허가하지 않도록 할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연근해 일정지역을 청정(淸淨)지역으로 설정해 오염발생의 원인이 되는 일체의 시설물과 배출업소의 입지를 규제할 계획이었다. 청정지역으로 지정될 대상 지역으로는 동해의 경우 ▷속초에서부터 북평에 이르기까지의 연근해 지역과, 남해의 경우 ▷거제부터 여수 앞바다까지, 또 ▷여수에서 목포 앞바다까지를 대상으로 꼽았다. 서해의 경우는 ▷중부기지에서 군산­비인(庇仁)지구 앞바다까지 바다와 ▷군산에서 목포지역에 이르는 연근해 바다를 모두 청정지역으로 묶을 계획이었다. 연근해 바다는 물론 무분별한 간척 등으로 인한 갯벌파괴도 규제할 계획이었다고 오수석은 말한다.

이같은 국토계획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정수도 건설을 통한 광역개발을 통해 6백만명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산업기지(창원의 20배 규모)를 동시에 건설할 계획이었다. 미래의 국토계획은 3가지 목적을 추구했다. 국민들에게 3가지 복지혜택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이다.

우선 내집 마련이다. 강제저축을 통해 10년 직장생활을 하면 집을 가질 수 있도록 하려 했다. 그것은 대학을 나왔건 공고를 나왔건 상관없이 집을 분양받을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다. 1백%의 주택보급률이 목표였다. 두번째 교육에 대한 약속이다. 능력있는 사람들이 공고를 가도록 유도하기 위해 기술교육을 대폭 강화할 생각이었다. 기술을 가진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공고 출신 기능인력들이 일하면서 전문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하고 대학은 스스로 돈벌어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세번째 복지는 의료혜택인데 이는 기업들을 참여시켜 병원을 짓도록 하고 의료보험혜택을 주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시료원으로 이름지은 이들 병원들은 주로 대기업들을 참여시킬 계획이었다. 그래서 아프면 고쳐준다는 확신을 근로자들에게 심어주려고 했다.


박정희는 국토개조계획을 통해 무엇을 추구했나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통해 우선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을 집권의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수출위주의 경제구조 건설과 중화학공업화가 이에 해당한다. 두번째 박정희가 추구했던 것이 국민의 정신 개조였다. 반만년 동안 외세의 지배에 시달려 스스로 열등감에 빠져 있던 우리 민족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정신을 심어주려 했다. 새마을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또 국민들이 문화와 역사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민족문화 발굴과 계승에 정책적인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에 대한 성역화 사업이나 경주개발, 정신문화원 건립과 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새마을운동 또한 농촌운동에만 그치지 않고 직장 새마을운동으로 확대하여 대통령과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마을연수를 받도록 했다. 즉 국민정신 개조운동으로 승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박정희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바로 국토개조계획이다. 국토의 미래, 발전의 청사진을 제시하려 했다. 국토개조계획은 박정희의 최종 목표였는지 모른다.

박정희는 72년 유신체제를 출범시키면서 그 이듬해인 73년 중화학공업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80년 1백억달러 수출, 1인당 국민소득 1천달러 달성’이라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 목표를 국민들에게 제시했다. 중화학공업화라는 어려운 말을 이토록 쉽고 간결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박정희가 70년대초 내건 목표는 실제보다 앞당겨 달성된다.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박정희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그때 떠올린 것이 행정수도 건설계획 아니었을까.

박정희는 수석비서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혼잣소리처럼 다음 임기 만료 전에 대통령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나도 잘 알아. 나도 대통령 그만두고 훨훨 온천이나 한바퀴 돌고 싶어”했다. 측근 중에 비슷한 말을 들은 사람은 여럿이다. 일부에서는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을 근거로 대통령이 후계구도를 실제로 구상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정렴 실장도 그의 회고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 만료 1년쯤 전에 대통령직을 사퇴할 뜻을 밝힌 적이 있다”고 증언한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임기 만료 1년전 대통령 유고시에는 선거를 하지 않고 총리가 남은 임기를 대행하도록 돼 있었다. 10·26 사건이 나기 1년전인 78년 5월 박정희는 제2대 통일주최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으니 그가 사퇴하려 했다면 임기 6년이 되는 84년보다 1년쯤 전인 83년이 사퇴 시점이 된다. 박대통령은 그때쯤에 “안보상의 위기가 가시면 김종필을 다시 총리로 임명하여 대통령 권한대행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말한 적이 두 번이나 있다고 김실장은 증언한다.

이에 대해 오원철 수석은 박정희는 한국의 공업화를 성공시키고 그 다음 단계로 국토개조라는 미증유의 거대 프로젝트를 꿈꾸고 있었다. 오원철 수석은 “국토개조계획에 대한 그분의 집착으로 미뤄볼 때 10여년 이상의 장기간이 소요될 사업을 놔두고 스스로 물러날 분이 아니다”고 말한다. 70년대 초반 갖가지 어려움을 무릅쓰면서 중화학공업화를 위해 유신체제라는 초강수를 동원했던 박대통령이다.

사실 박정희가 구상하고 있는 국토개조계획은 그 규모로 볼 때 박정희가 가진 카리스마 없이는 실현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오수석은 박정희가 대통령을 사퇴하더라도 실제적인 막후권한을 유지할 것이며 국토계획과 행정수도 건설을 전담하는 기획단장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당시 했었다고 말한다.

박정희가 국토개조계획을 집권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는지, 아니면 한국을 일본과도 견줄 수 있는 선진국으로 도약시키기 위해서는 공업화와 국민의 정신개조, 또 국토개조계획이 필요한데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에서 어쩔 수 없이 장기집권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같은 이분법적인 분류는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결코 자신과 국가를 구분하여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는 조국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지금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조국의 미래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하고 구체적인 그랜드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자신의 구상대로 국가를 성공적으로 바꿔왔고 경영해 오다 10·26으로 그 계획이 결말을 보지 못하고 좌절됐던 것이다. 국토개조계획은 ‘선진조국 건설’이라는 목표를 가진 박정희식 그랜드 디자인의 완결판이었다.

10·26 이후 우여곡절 끝에 등장한 신군부 세력은 겉으로는 박정희 정권을 계승한 후계자로 비춰졌다. 같은 군부정권인데다 후계자인 전두환 장군이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던 후배군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경영과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보면 후임 5공정권은 전임 박정희 정권의 정책을 철저히 외면했다. 철저하게 박정희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데 주력했으며 박정희가 중·장기적으로 추진해 왔거나 계획했던 중요정책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중단시켰다.


국토개조계획 왜 무산됐나

대표적인 예가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작업이다. 5공정권은 산업합리화라는 명목으로 박정희 때 수립했던 중화학공업정책을 대거 통폐합 조치했다. 또 박정권이 중화학공업화를 기반으로 야심적으로 추진하던 방위산업을 상당부분 스스로 포기했다. 핵개발과 미사일 개발 포기가 대표적인 예다. 구체적으로는 국방과학연구소의 해체로 나타났다. 이것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정통성 시비에 전전긍긍하던 5공정권은 이같은 친미정책의 대가로 마침 등장한 미국의 레이건정부로부터 국가원수로서 첫 미국방문의 초청을 받을 수 있었다. 정통성 부족에 허덕이던 5공은 이를 계기로 권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이것이 5공이 집권과정의 정통성 부족을 대미 압력에 굴복하는 것으로 메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는 이유다. 5공과는 달리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며 집요하게 자주국방과 이의 기반이 되는 방위산업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10·26사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설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는 것이다.

5공은 박정권 때의 중화학공업화가 당시 경제위기의 주범인양 몰아가기도 했다. 중화학과잉투자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80년초 오일쇼크가 지나고 경기가 회복되자 중화학공업화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소위 펀더멘탈론이 등장하는 것이다. 한국이 여타 동남아 국가나 남미 국가와 다른 것은 바로 경공업부터 중화학공업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제조업의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80년대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10대 공업국가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시대 중화학공업화 성공이 결정적 디딤돌이 됐던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5공정권이 박정희 유산 중 철저하게 무시했던 또 하나의 예가 바로 행정수도 건설계획과 2000년대를 위한 국토계획이었다. 거기에는 오원철 수석에 대한 신군부의 개인적인 악감정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총괄하던 오수석 중심의 기획단과 군부는 무기도입과 무기의 국산화계획과 관련해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다. 그때마다 박정희는 오수석의 손을 들어줬다. 이 때문에 군부인사들에게 오수석은 눈에 가시처럼 비춰졌다. 10·26 이후 신군부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던 5·17계엄확대조치 때 오원철 제2경제수석은 정치인이 아닌 관리로서는 유일하게 김대중·김종필·이후락 등의 정치인들과 함께 부정부패혐의로 신군부에게 체포돼 강제 재산헌납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군부의 일부 강경파들은 당시 오원철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5·17 이후 중화학공업추진단은 해체의 길을 걷게 된다. 단장인 오수석이 5·17 이후 부정축재자로 몰려 군검찰에 끌려간데다 아무도 기획단의 업무에 관심을 갖지 않아 자연스럽게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부단장으로 마지막까지 기획단을 지켰던 청와대 비서관(1급)이자 당시 부단장이던 김광모(현 테크노서비스 사장)씨는 마지막까지 사무실을 지키면서 위에서 지시가 있으면 업무를 인수인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씨는 80년 4월 그동안의 연구를 총결산하는 “행정수도 건설의 구상”이라는 이름의 최종보고서를 내기도 했다.<사진 참조> 이 보고서는 업무를 인수인계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인계받을 사람이 없었다. 직제상으로는 그때까지 대통령 비서실의 지휘를 받았으니 업무의 인수인계도 차기 대통령 수석실로 해야 했으나 5공 정권의 경제수석이던 김재익씨는 여기에 일언반구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건설부·국무총리실 등 관계부처도 마찬가지였다. 기획단에서 하고 있는 일이 전부 어느 한 부처의 소관사항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통령이 직접 진두지휘하겠다며 청와대로 끌고 왔던 사업들인데 그 지휘자격인 대통령이 갑자기 사라지자 누구 하나 거들떠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화학공업단에서 추진하던 사업은 크게 나눠 중화학공업 추진과 방위산업, 행정수도 건설 등 3개로 나눠볼 수 있다. 이중 중화학공업 추진은 마무리단계였으므로 차기 경제수석이 관심을 갖지 않아도 관계부처(주로 상공부)에 의해 업무의 승계가 자연스레 이뤄졌다. 그러나 방위산업은 5공정권에 의해 적극적으로 포기됐고 행정수도 건설계획 또한 철저하게 무시됐다.


인수인계하려 해도 관심조차 안 보인 5共정권

5공정권은 행정수도 건설과 2000년대를 향한 국토개발계획과 같은 장기적이고 대규모 프로젝트를 벌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김광모 비서관은 “전두환 대통령은 행정수도 건설계획에대해서는 보고조차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때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 노릇을 했으며 5공정부에서 동자부장관까지 지냈던 박봉환 씨도 “5공초기에는 행정수도 건설문제를 논의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며 “내가 아는 한 정부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김광모 전 비서관은 “행정수도 건설과 같은 건설사업은 기본적으로 확고한 권력기반을 갖지 않고서는 추진하기가 어려운 사업”이라며 “앞으로도 이같은 사업추진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5공초기에 건설부장관을 했던 김주남(金周南, 68) 씨는 “행정수도와 관련된 업무를 인수인계 받은 적도 없고 이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도 없다”며 “당초부터 실현성 없는 계획이었으므로 흐지부지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행정수도 건설계획에 대한 당시 5공정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반응이다. 김 전 장관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나 김재익 경제수석 등으로부터 행정수도 건설계획에 대해 지시를 받은 적도 없고 이들이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본 적도 없다”며 “나 자신도 국가적 낭비이고 실현성 없는 계획으로 봤기 때문에 별다른 흥미를 갖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김 전 장관은 그러나 흥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니라 당시 대장으로 예편하고 정무제2장관으로 있던 노태우 씨가 행정수도 건설계획을 어디선가 듣고와서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노장관은 건설부장관이던 김장관 방에 들러 “행정수도 건설계획에 대한 경과를 알고 싶다”고 물어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장관은 노씨를 데리고 당시 정부종합청사에 전시돼 있던 행정수도 모형도를 보여주며 개략적으로 추진경과를 설명해 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행정수도 건설은 국가적 낭비이고 경제적으로도 불가능한 계획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함께 말해줬다. 그러나 김장관은 오원철 수석이 주도하던 당시 국토개조계획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장기지구가 행정수도의 적지로 일찌감치 점찍혀 있다는 사실도 들은 바 없다고 말했다.


박철언 만나 인수인계해 주려 했던 오원철의 좌절

5공정부에 의해 좌절된 국토개조계획에 아쉬움을 갖고 있던 오원철은 6공정부가 들어서자 새정부에 인계되지 않은 이 계획을 6공정부에 전하고자 했다. 그것이 나라일을 해왔던 그로서는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가 노태우 대통령을 만날 방법은 없었다. 당시 그는 5공정부에 의해 모든 공식적인 직위를 박탈당한 것은 물론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받고 있는 신분이어서 야인(野人)으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주위에 월계수회 간부로 활동하던 사람이 있어 박철언 당시 체육부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박철언은 월계수회를 통한 성공적인 선거운동으로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또 대통령의 처조카라는 인척관계 때문에 당시 제2인자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권력에 선을 대려던 사람들이 박장관을 만나기 위해 줄을 서 있을 때여서 그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박철언을 만난 곳은 앰버서더호텔이었다. 그 호텔에는 당시 박씨가 전용으로 쓰는 넓은 방이 있었다. 보좌진은 오원철에게 다음 약속 때문에 15분내에 면담을 마쳐주기를 요구했다. 오원철은 불쾌했으나 모욕감을 꾹 눌러참았다. 박철언과 마주앉자 오원철 씨가 먼저 물었다. “호칭을 뭐로 했으면 좋겠습니까?” 박씨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장관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오원철은 또 한번 불쾌감을 느꼈다. 국가경영에 있어서는 후배도 한참 후배인 박철언이 자신에게 배움의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는 데 대해 실망했던 것이다. 게다가 나라를 위한 중요한 업무를 인수인계하려는 마당인데 마치 취업 청탁을 하러 온 민원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불쾌한 감정을 꾹 참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필생의 목표로 추진했던 행정수도 건설계획을 설명했다. 이 계획이 어떻게 시작됐고 이것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사업인지 그 중요성과 시급성을 강조했다. 새 정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부연해서 설명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계획은 반드시 국가를 위해 이어받을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대단히 미온적이었다. “검토해 보겠습니다”는 의례적인 반응이 고작이었던 것으로 오원철은 기억한다. 그는 주어진 시간 15분도 채우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마음속으로 “이 친구는 국가를 경영할 만한 재목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후 그는 이 국가적 프로젝트를 인수인계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로서 한국은 수도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래서 우리 경제를 또 한차례 도약시킬 수 있었던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상실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