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박정희, 75년 총체적 국가위기 정면돌파로 극복하다.

동 아 2008. 3. 16. 18:39

박정희, 75년 총체적 국가위기 정면돌파로 극복하다.

<인도지나지역에서의 연쇄적공산화 조짐과 유신헌법철폐요구에 따른 연두기자회견>

1975. 1. 14

 

 

박정희 대통령은 1975. 1.14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국 국제정세와 75년의 경제전망 및 시국관을 밝힌 다음 일부 인사들의 안보관과 그릇된 시국관에 대해 경종을 보내는 한편 유신체제에 대한 부정적인 자세에 쐐기를 박았다.

 

2시간40분에 걸친 회견시간 중 유신헌법 개헌 문제에 대해 48분을 할애함으로써 국내정국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박대통령자신의 소신을 피력했고 다음에 경제 난국극복문제를 35분 동안 설명함으로써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경제불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국가원수로서의 집념을 나타냈다.

 

유신헌법 개헌문제에 대해 박대통령은 한마디로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적화통일 하겠다는 폭력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북으로부터의 위협이 없어질 때까지는 현행헌법을 고쳐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해 유신체제의 궤도수정이 조금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박대통령은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현실여건으로 보아 유신만이 현 국난을 극복하는 길임을 누차 역설 해왔던 점에 비추어 박대통령이 회견에서 천명한 이같은 결론은 74년 연말부터 본격화된 개헌요구에 대한 최종적인 회답으로 천명 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계속적 유신헌법철폐 개헌을 요구한다면, 이에대해 '국민투표'로서 가.부를 결정 짓자고 담화문을 발표하게 된 다.

 

이 문제로 더 이상 나라와 국정이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 수 없고, 우리의 미래 또한 보장, 담보될 수 없기에, 박대통령은, 그렇다면은 '유신헌법 철폐 유무'에 대해 국민에게 존치여부를 물어보자고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 다. 결국 72년 11월21일 '유신헌법 법안' 국민투표에서 90%이상 국민투표율과 90%이상 찬성율에 의해 제정된 유신헌법이 만 2년만에 또다시 '유신헌법 존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75년 2월 12일에 실시하게 된 다.

 

당시 국민투표는 단순히 '유신헌법 존치유무'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 자신과 정권에 대한 신임여부를 묻는 것으로 간주, 국민투표 결과가 불신임으로 나타 나면 그 즉시 퇴진하겠다고 천명하게 된다. 박대통령의 이런 의지의 표현은, 69년에 있었던 개헌때와 마찬가지로 현 시국을 정면 돌파하여 박정희 자신과 정권에 대해 구차하게 소모성 정쟁으로 몰고 가기보다는 무한 권력을 가진 국민들에게 신임을 물어 혼란을 최 단시일내 종식시키고저 한 것이다.

 

결국 유신헌법이 72년 국민의 절대적 지지로 제정되고 만 2년만에 또다시 '존치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75년 2월 15일 실시하여 국민들은 '유신헌법의 존치'에 손을 들어 줬고, 이와 동시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신임까지 지지한것으로 간주되어 '유신헌법'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비 생산적인 정쟁의 명분을 종식시키게 된 다.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 존치'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끝난 3일뒤인 75년 2월15일 오전 10시에 특별 담화를 통해 '국민적 대화합과 단결로 총체적 난국을 헤쳐나가자'는 취지로, 일부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긴급조치 제 1호(개헌논의 금지) 및 제 4호(민청학련관련자 및 학원데모금지)위반자 전원을 소정의 법절차에 따라 즉각 석방하겠다고 밝혔고, 이후 이들은 석방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75년 연두기자회견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한 나라의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모든 적으로 부터 위협을 나라를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이다.'라고 말 했듯이, 박정희 대통령은 72년 유신헌법 필요성을 제의 했을때 자신의 안위 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생존권을 지키기위한 '미래를 예측하고 구국의 신념으로 결단'을 내린 것이고 당시 국민들은 절대적 지지로서 동의와 그 정당성을 부여 한 것이다.

 

이런 박정희의 미래대한 결단은 채 3년도 안돼 실증적으로 증명하게 된다. 월남의 공산화를 막고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월남전에 개입한 미국은 자국의 반전 여론과 지리멸열한 베트남전에서의 그 한계를 인식하고 월남에서의 일방적 철수를 하게되었고 미국에 한 주먹도 되지 않던 월맹은 월남전에서 미국을 상대로 결국 승리한 꼴이 되었고  월남은 공산화되고 만 것이다.  이런 여파는 인도지나 지역에서의 급속한 연쇄공산화사태를 불러왔고, 한반도 역시 끊임없는 전쟁준비와 도발에 광분해 있던 북한 김일성에게 또다시 남침할 수 있는 오판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남북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역시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때부터 우리나라는 없었다. 그래서 나라잃은 �픔이 무었인지를 잘아는 대통령이였고  철저하게 우리의 지난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고 오늘에 대처하고자 유신헌법을 제안한 것이다.  유신헌법은 이런 총체적 위기속에서 오늘의 기성세대가 자라나는 우리 자식들에게 만은 가난에서 허덕이지 않게하고 어렵게 되찾은 우리 '조국'을 안전하고 부강하게 만들어 천년만년 누리도록 그 기틀을 마련하기위해 총화단결하여 모든 위기에 대해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우리들의 의지와 신념이 결집된 하나의 약속으로 민주적 절차에 의해 그 정당성을 국민의 숭고한 뜻에 의해 태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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