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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정유대동보(光山金氏丁酉大同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45대 신무왕(神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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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및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신라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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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헌강왕(憲康王)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배경이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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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광은 신라 45대 신무왕의 3자인 왕자(王子)가 틀림이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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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장동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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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시조 흥광(興光)의 아들 2세 식(軾)이 신라에서 각간(角干: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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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급)을 지냈고, 3세 손자 길(佶)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려 창업에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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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세워 삼중대광 사공(三重大匡 司空)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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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준(峻)은 길의 아들로 벼슬이 좌복야(左僕야:정2품의 벼슬)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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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렀으며, 준의 아들 5세 책(策)은 964년(광종 15) 우리나라에서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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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실시한 과거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니 임금께서 잔치를 베풀어 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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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축하하고 특별히 의봉문을 열어 말(馬)을 하사하면서 마부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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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고삐를 잡고 출입케 하여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였으며,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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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은 좌복야(左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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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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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아들 6세 정준(廷俊)도 1035년(정종 1)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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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6품이나 종5품 또는 감찰사의 정6품 벼슬)를 거쳐 1055년 내사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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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의 관직), 1057년 11월에 문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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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고려 문하부의 정2품 관직)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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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양감(良鑑)은 정준의 아들로 문종5년에 급제하여 상서어사를 거쳐(서기 1070년) 문종 24년 상서우승, 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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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대부에 이어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를 지내고, 이듬해에 상서좌승겸 어사대사가 되어 1072년(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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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태복경(太僕卿)으로 사은사(謝恩使:나라에 베푼 은혜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외국에 보내던 사신)가되어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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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 나라에 가서 종래 등주로 거치던 송나라의 왕래를 요나라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항로 변경하여 명주를 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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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하는데 합의를 보았으며 태묘(太廟)와 태학을 도안하고 유학에 대한 종지를 깊이 연구한 후 1974년(문종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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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에 귀중한 자료를 가지고 귀국 하였다. 이 해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가 되고 동지중추부원사 참지정사,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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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병 부사를 거쳐 1083년 좌복야에 올랐다. 선종(宣宗)초 문하시랑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1087년(선종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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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상서 호부사를 거쳐 수태위에 올랐으며, 사도진흥(斯道振興)에 공헌한바 큼으로 이학지종사(理學之宗師)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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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었다. 1957년 전북 고창의 화동서원에 철향(綴享)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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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8세 약온(若溫)은 고려인종때 문신으로 문과에 급제한후 중서사인 합문사 지추밀원사 참지정사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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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쳐 서기 1122년 (인종 즉위) 중서시랑 평장사에 검교사도(檢校司徒), 수사공(守司空), 상주국(上柱國)이 더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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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문하시중이 되었다. 국구(國舅) 이자겸과 내종지간이면서도 아부하지 않고 청빈한 자세로 일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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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의원(義元)은 양감의 아들이며 약온의 동생으로 17歲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부음으로 관직에 올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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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23세에 수어도감 판관이 되고, 감찰사로 연천을 지킬 때 여진족을 쳐서 큰 공을 세웠다.서기 1122년 병부시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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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고 이어 호부상서 지추밀원사를 거쳐 늙어 사직하니 특진 금자광록대부(特進 金紫光祿大夫)에 제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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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약온과 같이 국구 이자겸과 내종지간이면서도 아부한 적이 없이 청빈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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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9세 광중(光中)은 의종때 간의대부(諫議大夫:고려 문하부의 관직)와 비서감(종3품 관직)을 역임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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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광중의 아들 10세 체(?)는 순안현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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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위(位)는 삼사사(三司使)이고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에 추봉 되었으며, 상서령(尙書令)에 皇追封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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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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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원의(元義)는 벼슬이 특진 금자광록대부 수태전(金紫光祿大夫 守太傳)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 平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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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이고 상장군 판병부사(上將軍 判兵部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간공(景簡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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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파 파조인 14세 주정(周鼎)은 충렬왕때 문신으로 몽고군(蒙古軍)의 침입을 받아 여원연합군이 편성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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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지도첨의 부사로 부원수가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출장입상 하였으며, 1278년(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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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4) 행종도감사(行從都監使)가 되어 충렬왕을 따라 원(元)나라에 가서 공을 세웠다. 광정대부 도첨의사사 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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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태학사 동수국사 판삼사사(匡靖大夫 都僉議使司 寶文閣太學士 同修國史 判三司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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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지숙(之淑)은 元義의 증손자로서 광정대부 도첨의중찬 상장군(匡靖大夫 都僉議中贊 上將軍)이며, 판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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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判吏部事)를 치사(致仕) 받았으며, 시호는 광절공(匡節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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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 지(祉)는 금자광록대부 문하평장사(金紫光祿大夫 門下平章事)요 상장군(上將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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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인연(仁沇)은 추성보절익찬공신(推誠補節翊贊功臣)이며, 삼중대광 도첨의찬성사(三重大匡 都僉議贊成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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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시호는 경열공(敬烈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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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 인연(仁衍)은 벼슬이 상서(尙書)이고 封 광산군(光山君)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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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元命)은 仁沇의 아들로서 삼사좌사 상호군(三司左使 上護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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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명(續命)은 원명의 아우로서 삼사우사 첨의평리(三司右使 僉議評理)이며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13세 대린(大鱗)의 아들 14세 연(璉)은 양간공파 파조(良簡公파 派祖)이며, 충렬왕(忠烈王)때 문신으로 경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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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휘사로 동정(東征:일본정벌)하려 할때 출정을 앞둔 어느날 밤 차고 있던 금어(金魚)가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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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스스로 해몽하기를 “내 몸에 계급이 떨어졌으니 패전의 징후다”하고 출정장군을 사퇴한 명신으로 그후 첨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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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 찬성사 (僉議侍郞 贊成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간공(良簡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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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규(珪)는 郎將公派 派祖로서 충렬왕 때의 무신, 여원연합군에 들어가 낭장동정이 되어 전공을 많이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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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이(珥)는 충렬왕 때 제안 황대전고(提按 黃臺典誥)를 지냈으며, 광산현 제영시서(光山縣 題詠詩序)를 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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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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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수(須)는 문과에 급제하여 어사(御史)를 거쳐 영암부사를 지내고 1271년(원종 12) 진도(珍島)에서 패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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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초(三別抄:고려 최씨 집권 시대에 특수하게 조직된 군대)가 제주(濟州)로 몰려들자 안찰사 권단(權但)의 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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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명의 관군을 이끌고 제주를 지키다가 전사했으며, 그의 아들 태현(台鉉)은 문정공파 파조(文正公派 派祖)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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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1302년(충렬왕 28)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 황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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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날에 축하하러 가던사신)로 원나라에 갔을때 원나라 황제가 모든 진공사는 연경(燕京)에서 기다리라고 하자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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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황제의 명을 어길지언정 행재소(行在所:임금이 대궐을 멀리 떠나 거동할 때에 임시 머무는 곳)에 가는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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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주(君主)의 명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여 중서성(中書省)의 허락으로 행재소에 가게 되었으며 원나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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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 충성을 크게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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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충렬왕 부자지간에 불화가 있을 때 공평하게 처리하여 화해케 하였으며 충렬, 충성, 충숙의 세왕조에 걸쳐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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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역임하면서 백성을 잘 다스렸고 역대의 전례와 고사에 정통 하였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동국문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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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대광 문하시중 수문관대제학 판전리사사(三重大匡 門下侍中 修文館大提學 判典理司事)이며, 시호는 문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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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正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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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심(深)은 충렬왕때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지낸뒤 딸이 원나라 무종제(武宗帝)의 왕후가 되었으며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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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성수의협보충량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우정승 판총부사 상호군(輸城守義協輔忠亮功臣 壁上三韓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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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大匡 都僉議右政丞 判摠府事 上護軍)이며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에 封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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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流)는 심(深)의 아우로서 충목왕 때 문신, 兄 충숙공 심(深)과 함께 같이 벼슬은 문하시중 수문전태학사(修文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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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學士)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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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사원(士元)은 충렬왕 때 문신이며, 벼슬은 삼중대광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三重大匡 匡靖大夫 僉議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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郞贊成事)를 지냈으며, 시호는 정경공(貞景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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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 사형(士亨)은 충렬왕 때 문신으로 兄 貞景公 士元을 도와 벼슬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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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광재(光載)는 충선왕(忠宣王)때인 13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혜왕(忠惠王)이 원나라에 갈때 호종한 공(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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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사복시승(司僕侍承)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郞)에 올랐다가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판도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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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등을 역임하고 충정왕(忠定王)때 참의평리 삼사우사 전리판서(參義平理 三司右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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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理判書) 및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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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때 어머니가 죽자 여막을 짓고 3년동안 거상하자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곳을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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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방 효자리(靈昌坊孝子里)로 정표를 세우게 하였다.(아버지 文正公 태현, 兄 文敏公 광철과 같이 文字 諡號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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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二代 文字 諡號 및 兄弟 文字 諡號를 받고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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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광리(光利)는 章榮公의 아들로 공민왕 때 봉익대부 전리판서 영 삼사사(奉翊大夫 典理判書 領三司事)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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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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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 영리(英利)는 공민왕 때 통의대부 판군기감사(通議大夫 判軍器監事)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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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18세 정(鼎)은 공민왕 때 전라도찰방(全羅道察訪)을 하고 계속하여 추성좌리공신 중대광 광성군(推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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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理功臣 重大匡 光城君)에 책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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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는 남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묘소로서 강원도 춘천시 칠전동 617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享祀는 매년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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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 10월 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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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白家)에 능통한 첨(瞻)은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한 회조(懷祖)의 아들로 13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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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왕 2)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를 지냈으며 음률(音律)에 밝아 아악(雅樂)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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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하고 의례(義禮)에도 정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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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후 여러 청환직을 거쳐 예조전서로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을 겸임. 1404년(태종 4년)우군총제가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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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뒤에 참지 의정부사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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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인우(仁雨)는 공민왕 때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고, 1361년 홍건(紅巾)의 난(亂)에 호종하여 1등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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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책록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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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승길(承吉)은 함종현령(咸從縣令)이요, 麗運이 다하자 야은 제현(冶隱 諸賢)으로 義理를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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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약채(若采)는 光城君 鼎의 아들로서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의(左司議)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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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동 도관찰출척사(忠淸道 都觀察黜陟使)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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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 약항(若恒)은 호는 척약재( 若齋)이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초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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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에 능하였으나 표전문(表箋文) 사건으로 명나라에 불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죽었다. 자헌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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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憲大夫)에 추증(追贈)하고 광산군(光山君)에 추봉(追封)하면서 청백리(淸白吏)에 녹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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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우 약시(若時)는 우왕 때 太宗과 더불어 동방 급제하여 봉상대부 전의부령 진현관직제학(奉常大夫 典儀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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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 進賢館直提學)이시며, 麗運이 다 함에 廣州에 은거하면서 李太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청맹(靑盲)을 핑계하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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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조선에 나가지 않았다. (두문동 칠십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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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한로(漢老)는 아버지는 자빈이고 1383년(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예의좌랑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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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404년(태종 4년) 이조전서, 이듬해에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딸이 양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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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과 혼인하자 좌군 동지총제에 오르고 다음해 판한성부윤이 되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판서,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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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참지의정부사, 예문관대제학 겸 판의용순금사사를 거쳐 1417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 해 세자 양녕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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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천한 여자를 바친죄로 죽산에 부처 되었으며, 세자와 옹서간의 인연이 끊기고 청주, 연기등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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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신원되어 좌의정에 추증되고 광산군에 추봉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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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예몽(禮蒙)은 1432년(세종 1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440년 부사직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다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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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집현전 부교리를 지냈다. 1447년 문과증시에 급제한 후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1460년(세조 6년) 흥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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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466년 발영시에 급제하여 이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행 동지중추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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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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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국광(國光)은 감찰(監察)을 지낸 철산(鐵山)의 아들로 1441년(세종 23)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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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院正字)에 등용되어 감찰, 지평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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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세조(世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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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죽자 신숙주(申叔舟) 등과 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고 우의정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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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1등이 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사로 명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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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다. 일찌기 세조의 명으로 서거정, 강희맹, 최항(崔恒), 노사신(盧思愼)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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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에 착수하여 이를 완성하고 1469년에 반포하였다. 시호는 의정공(議政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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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동생 겸광(謙光)은 1453년(단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평안 감사를 거쳐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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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左理功臣) 3등에 책봉되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으며, 청백리에 녹선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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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여석(礪石)1465년(세조 10년) 별시문과에 급제, 경연관을 거쳐 군자시 주부에 올랐다. 그 후 도승지, 충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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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대사헌등을 역임하고 1493년(성종 24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앞서 강원도 관찰사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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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 중 성리학에 관한 책을 간행하여 학문진흥에 공이 컸다 하여 왕의 포상을 받았다. 무주의 도산사(道山祠)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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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되었으며 시호는 충목공(忠穆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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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구(絿)는 사온직장공(司 直長公 英)의 7세손으로 시호는 문의공(文懿公), 호는 자암(自庵), 조선 초기 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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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濩), 양사언(楊士彦),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함께 4대 서가(書架)로 유명한 구(絿)는 현감을 역임한 계문(季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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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아들로 당대에 이름난 학자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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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정자를 거쳐 부제학에 이르러 기묘사화로 개령(開寧)에 유배 되었다가 1533년(중종 28)에 풀려나 고향에서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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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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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생전에 한양 인수방(仁壽坊)에 살았으므로 그의 서체를 인수체(仁壽體)라 불렀다. 어느날 옥당에서 숙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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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촛불을 밝히고 글을 읽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뜻밖에 중종(中宗) 임금이 별감에게 술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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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들려 문앞에 서있자 놀라 엎드리니 중종이 말하기를 “달이 밝은데 글 읽는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찾아 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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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어찌 군신의 예(禮)가 필요 있으리오, 친구로서 서로 대함이 마땅하도다”하고 술을 함께 즐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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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만수(萬壽)는 천수(千壽), 백수(百壽), 구수(九壽)의 세 아우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
25세 언기(彦璣)는 호가 유일재(惟一齋)이며, 퇴계 이황과 같이 학문하며 서당을 세워 많은 인재를 배출 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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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안동(安東) 문학융성의 창도자로 칭송되며 그의 제자 문인들이 보덕단(報德壇)을 세워 사림불천지위(士林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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遷之位)를 매년 3월에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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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장생(長生)은 대대로 석학(碩學)과 명신을 많이 배출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게한 기호학파(畿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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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派)의 대가(大家)며, 광산 김씨의 우뚝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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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명종 3)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당대 8문장가의 한 사람인 송익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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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翼弼)에게 예학(禮學)을 전수받고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예론(禮論)을 깊이연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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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아들 집(集)에게 전승시켜 조선 예학(朝鮮禮學)의 거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으며 그의 후손에서 7명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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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학(大提學)이 배출되어 이때부터 광산 김씨의 전성기를 누렸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등의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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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배출하였다.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벼슬은 형조참판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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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1717년(숙종 43년) 문묘(文廟)에 배향 되었고, 안성의 도기서원과 연산의 돈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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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遯巖書院)등을 비롯한 10여개 서원에 배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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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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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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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내 자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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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학문을 계승한 아들 집(集)은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에 이르러 광해군(光海君)의 문란한 정치를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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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 한때 은퇴하였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후 부여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되어 지평(持平), 집의(執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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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거쳐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올랐으나 공서(功西:서인에서 갈라진 당파의 하나)가 집권하자 다시 퇴직했다가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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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좌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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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더욱 깊이 연구하여 예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문묘와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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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되었다.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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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의 아들 반(槃)은 집(集)의 동생으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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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10년동안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1624년(인조 2) 정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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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에 급제하고 전적(典籍)을 거쳐 형조좌랑(刑曹左郞)등 여러관직을 거쳐 대사간을 역임한 후 이조참판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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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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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여섯명중 둘째 익희(益熙)는 인조때 대사성(大司成:정3품)을 지내고 효종때 형조 및 이조판서를 역임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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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셋째 익겸(益兼)은 병자호란때 남한산성(南韓山城)이 포위되어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자 분신 자결하여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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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어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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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익훈(益勳)은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으며, 막내 익경(益炅)은 어려서 송시열(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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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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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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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현종 15) 예조참판때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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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대공설(大功設: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허목(許穆) 등의 기년설(朞年說:만1년)이 채택되자 양성(兩性)에 유배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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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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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겸의 아들 만기(萬基)는 1653년(효종 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수찬, 교리, 정언등을 역임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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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