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1 ·21사태 이틀 후 공군에 북한 124군부대 보복 지시"

동 아 2010. 11. 21. 14:44
[주간조선]
 
"박 전 대통령, 1 ·21사태 이틀 후 공군에 북한 124군부대 보복 지시"


 
권성근 전 공군작전사령관. 그가 현역시절 직접 착용한 전투 조종사 헬멧이 보인다
 
 photo 허재성 영상미디어 기자

[발굴인터뷰] 권성근 전 공군작전사령관
<이 기사는 주간조선 2131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1·21사태 직후 북한 124군부대에 대한 공군의 보복폭격을 지시했다는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1·21사태 당시 공군 작전사령관을 지낸 권성근(權成根·84) 전 공군 소장은 지난 11월 9일 서울 양천구 목동 자택에서 주간조선과 만나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 직후 ‘코드원(박 대통령)’이 구두(口頭)로 공군에 북한에 대한 보복방안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밝혔다.

권 전 사령관은 “F-86 (세이버) 2개 편대, 8대가 한꺼번에 북한으로 떠서 북한 124군부대를 때리고 빠져나오는 계획이었다”며 “124군부대를 ‘외과수술식 정밀타격(Surgical Strike)’으로 흔적을 없애버린 뒤 돌아오려고했다”고 말했다.
 
1·21사태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124군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우리 군경과 교전을 벌인 사건이다. 기관단총과 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한 특수부대원 31명은 1월 13일 조선인민군 정찰국장 김정태로부터 지령을 받고, 1월 18일 자정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하했다. 31명의 무장공비 중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자백했다.

1월 21일 새벽 청와대 뒤 세검정고개 창의문(속칭 자하문)에서 불심검문을 당한 124군부대원은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당시 검문검색을 지휘하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과 정종수 경사는 현장에서 총탄을 맞고 순직했다. 1월 31일까지 군경은 소탕작전을 벌여 28명을 사살하고, 1명(김신조)을 생포했지만, 2명은 북으로 도주했다. 당시 도주한 1명은 박재경 북한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훗날 밝혀졌다. 북악산 호경암 등에는 당시 총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의 청와대 습격사건 때 무엇을 하고 있었나.

“1967년 봄 공군 작전사령관으로 경기도 오산에 부임했다. 1968년 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하고, 1월 21일 휴일을 맞아 서울 외곽 한양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그때는 휴대폰 같은 것이 없지 않나. 사태가 터진 직후 워키토키로 연락을 받았다. 이후 골프장으로 날아온 헬기를 타고 오산으로 급히 돌아갔다. 이후 한 달간 오산 지하벙커에서 머물면서 집에도 못가고 비상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오산 지하벙커에는 미 5공군이 만들어 둔 지휘통제실이 있다.”

- 무장공비 소탕 작전에 공군이 참여했나.

“공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단 북한군의 전면 도발에 대비 초비상상태에 돌입했다. 전 전투기를 비상출격이 가능토록 했다. 무장공비 소탕 작전 때는 밤새도록 ‘C-46 수송기’를 하늘로 띄워서 ‘후레아(플레어)작전’을 벌였다. 군경이나 행정조직의 요청이 있으면 무장공비의 예상 도주로에 조명탄을 쏟아붓는 작전이다. 당시 대구 기지에 있던 C-46 수송기를 내가 김포로 끌어올렸다.”

- “124군부대를 보복타격하라”는 박 대통령의 하명을 받은 것은 언젠가.

“1·21사태가 터진 다다음날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오산 지하벙커에 있는데 공군참모총장이던 장지량 장군으로부터 서울 대방동 공군본부로 빨리 올라오라는 명을 받았다. 오산에는 작전사령관이 수시로 사용하는 헬기와 비행기가 있다. 하지만 그날따라 헬기가 고장이 나서 빨간불이 껌뻑껌뻑 들어오는데 도무지 수리가 안됐다. 결국 평택에서 헬기를 차출해 공군본부에 도착했다.

겨우 서울 대방동 공군본부에 들어가니 장지량 총장은 이미 청와대에 들어간 상태였다. 공군본부에서 한참 동안 장지량 장군을 기다렸다. 이후 장 총장이 공군본부로 들어오더니 ‘코드원(박정희 대통령)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당장 공군에 보복 대책을 갖고 오라고 지시했다’고 내게 전했다. 당시 군에서는 박 대통령을 ‘코드원’으로 불렀다.” 

- 하명은 어떤 식으로 전해 받았나. 문건을 통해서 전해 받았나.

“(두 손을 휘저으며) 이런 것은 절대 문건으로 못 남긴다. 장지량 장군을 통해 구두로 전해 들었다.”

- 박 대통령은 왜 육군이 아닌 공군에 보복을 하명했나.

“북한 124군부대는 평양과 원산선의 가운데 아래 지점에 있다. 중부 내륙 한가운데 있어서 육군이나 해군은 도무지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이 없다. 공군밖에 없었다.”

- 당시 공군 작전계통의 최고 책임자였다. 보복계획을 어떻게 수립했나.

“모든 작전부대는 작전사령관 휘하에 있다. 수원의 10전투비행단에 보복계획을 준비하라고 했다. 10전투비행단은 124군부대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다. 오산에서는 보안상 보복계획을 입밖에 꺼낼 수 없었다. 바로 내 옆방에 미군 314비행사단장이 있었다. 결국 수원 10전투비행단을 순시하는 틈을 이용해 비행단장에게 보복계획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부대 순시하는 사이에 얘기하면 미군의 의심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

권 전 사령관에 따르면 미국은 1·21사태의 여파로 한반도에 전면전이 터지는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미군은 당시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진 상태였다. 권 전 사령관은 “북한 124군부대에 대한 보복타격은 극비리에 추진됐다”며 “보복타격 계획을 아는 사람은 박 대통령과 자신을 비롯해 장지량 공군참모총장, 수원 10전투비행단장과 직접 전투기를 몰고 갈 편대장 2명 정도”라고 밝혔다. 

- 보복작전은 어떤 내용이었나.

“F-86 (세이버) 2개 편대, 즉 8대가 한꺼번에 북한으로 떠서 북한 124군부대를 때리고 빠져나오는 계획이다. 124군부대를 ‘외과수술식 정밀타격(Surgical Strike)’으로 흔적을 지워버린 뒤 돌아오는 것이었다. 1개 편대는 4대의 전투기로 이뤄진다. 편대는 베테랑 소령급이 직접 지휘한다. 편대장 외에는 작전내용과 행선지에 대해 일절 함구했을 것이다.”

- 어떤 무기로 124군부대를 타격하려고 했나.

“전투기에 어떤 무기를 장착하고 북한으로 갈 것인지는 내 선에서 결정하지 않는다. 실무는 그쪽(10전투비행단)에서 가장 잘 안다. 지금도 공격 목표란 것이 있지 않나. 무기 선택은 지형지물에 따라 달라진다. 124군부대의 지형이나 방공망 등을 고려해서 몇 시에 출격할지, 태극기를 달고 갈지 말지, 폭탄을 사용할지, 네이팜탄(소이탄)을 사용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북한 124군부대 보복타격에 사용할 예정이었던 F-86 세이버 전투기와 동일기종. photo 조선일보DB

- F-86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F-86은 실전 경험이 있는 전투기다. F-86으로 124군부대를 치고 빠지는 데 전혀 문제없다고 판단했다. 난 모든 비행기를 다 몰아봤지만 F-86은 충분한 타격능력이 있다. U-2 정찰기같이 중요한 비행기는 미군이 이착륙을 일일이 체크하지만, 훈련한답시고 전투기를 띄워서 몰래 때리고 돌아오면 미군도 어쩔 수 없다. 훈련 비행기는 수시로 뜨고 내리는데 미군이 일일이 체크 못한다.” 

- 동맹국인 미국에는 왜 작전을 비밀에 부쳤나.

“미국은 눈에 불을 켜고 박정희 대통령이 혹시 사고를 치지 않을까 감시했다. 박 대통령은 원래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국은 처음에 5·16도 반대했다. 5·16 때 난 공군 작전국장이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행방불명이어서, 내가 비행기를 띄워 군사혁명 지지 공중시위를 벌였다. 비행기를 띄우니 미군 고문단과 정보국장이 와서 ‘허락 없이 띄웠다’고 난리치더라. 군사원조 물자는 미국의 허락을 받고 띄워야 한다고 하더라.” 

- 작전 준비와 진행상황은 어떻게 보고받았나.

“문서로 보고받거나 전화를 통해 상황을 체크하는 것은 엄두도 못냈다. 미군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서다. 심지어 암호를 사용할 엄두도 못냈다. 암호를 사용하면 미군이 더욱 이상하게 생각할 것 아닌가. 그래서 강구한 것이 자연스럽게 상황을 묻는 것이다. 전화를 걸어서 ‘별일없지?’라고 물어보면 그쪽에서는 ‘예’, ‘잘돼가나?’라고 물으면 그쪽에서는 ‘예’라고 답했다. 이렇게 말하면 미국도 해독을 못한다.(웃음)”

- 보복작전에 대비한 실제 훈련도 이루어졌나.

“실제 했을 것이다. 북한 124군부대와 동일거리에 있는 서해안의 섬까지 빠르게 날아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방향만 바꾸면 되는 것이다. 당시 구체적인 작전 상황에 대해 편대장 이하 조종사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밑에 아이들 시키지 말고 편대장급만 시켜라’고 했다. 부대원들은 그냥 편대장을 따라서 날아갔다 오는 것이다.”

- 북한 방공망에 대한 대비는 있었나.

“일본 오키나와에서 뜬 U-2 정찰기가 북한 영공을 헤집고 다녔다. U-2 정찰기는 중국과 북만주에서 움직이는 상황까지 손바닥처럼 안다. 북한으로서는 10만피트 위에 떠있는 U-2 정찰기를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요격 범위 밖이었다. 이는 북한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북한이 모든 전투기를 지하땅굴에 넣지 않았나.” 

- 공중전으로 비화됐을 가능성은 없나.

“북한은 손쓸 틈이 없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폭격이 가능하다. 레이더를 통해 ‘어, 뭐 이상한 놈들이 올라온다’고 포착하는 순간 상황은 끝난다. 이미 우리는 남쪽으로 도망친 상태로, 그렇게 되면 증거도 없다. 훈련한답시고 무장을 하고 돌아다니다 순식간에 치고 빠지는 방법도 있었다. 우리가 ‘간다’ ‘기다려라’라고 미리 통보하지 않는다면 미그기도 원천적으로 손쓸 방법이 없다.” 

- 보복타격을 가할 경우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이란 우려는 없었나.

“그런 걱정은 늘 했다. 보복에 대한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그래도 윗선(박 대통령)에서 하명한 것이니까 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누가 덮어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 공군 참모총장이냐, 나(공군 작전사령관)냐, 수원 10비행단장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작전계통에서는 내가 총책임자였으니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됐다면 내가 덮어썼을 것이다.”
 
북한 124군부대에 대한 공군의 보복타격 계획은 결국 흐지부지됐다. 권 전 사령관은 “한 달 동안 오산 지하벙커에 머물며 ‘고(Go)’ 사인이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끝내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청와대를 왔다갔다 하더니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며 “결국 한 일주일쯤 있으니까 공군 참모총장의 얼굴빛이 풀려서, 그때 ‘아, 결국 작전이 취소됐구나’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권 전 사령관은 124군부대에 대한 보복타격 계획이 취소된 까닭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권 전 사령관은 “지금 생각이지만 당시 미국에서 청와대를 도청했던 것 같다”며 “미국 대사관과 청와대가 가깝지 않냐”고 반문했다.

- 미국이 미리 인지했다는 심증은 무엇인가.

“오산 내 방 바로 옆에 미군 314비행사단장이 있었다. 그 친구 이름은 지금 기억이 안 난다. 이상하게 이 친구가 청와대로부터 하명받은 날 아침 6시부터 전화해 ‘모닝 커피를 마시자’ ‘점심을 먹자’ ‘내기 골프를 치자’ ‘영화를 같이 보자’고 밤 12시까지 조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집에도 못가고 있으니까 불쌍해서 위로하려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날 24시간 밀착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머리 위에 있었던 셈이다.”

- 124군부대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반대 급부가 있었나.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을 안 때리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국군 현대화’란 반대 급부를 얻어냈다. 공군의 F-4 팬텀 전투기와 육군의 T-1 전차와 해군 잠수함이 들어온 것도 그때다. 당시 미국은 최신예 F-4 팬텀 전폭기를 이스라엘에는 판매하고 있었지만, 우리한테는 절대 팔지 않았다. 결국 우리도 보복계획 이후 F-4 팬텀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냈다.

사실 1·21사태 전만 해도 우리 군은 북한군한테 어림도 없었다. 북한은 ‘미군만 없으면 한 주먹거리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북한은 ‘캐터필러(전차바퀴)’까지 생산했지만 우리는 소총도 못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그게 한(恨)이었다. 박 대통령이 왜 포항제철을 만들었나. 철판이나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 화기를 생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군현대화를 단행한 직후 우리 군의 전력이 많이 올라갔다.” 

- 북한이 왜 124군부대를 남파했나.

“김일성이 조급하게 판단한 것 같다. 김일성은 살아 생전에 ‘4·19를 놓친 것을 평생을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4·19 때만 해도 우리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5·16 이후 박정희란 사람이 등장해서 남한을 확실히 장악하자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남한이 단단해지자 124군부대를 보내 박정희 대통령을 테스트하려 한 것이다. 김일성도 124군부대가 청와대 뒷문까지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1·21사태 때 침투한 31명의 북한 특수부대원 중 생포당한 김신조씨. photo 조선일보DB

불심검문에 의해 정체가 발각된 북한 124 특수부대원들은 빠른 속도로 북으로 퇴각했다. 권성근 전 사령관은 “우리가 한발 앞서 생각한 그 이상의 초인적 속도로 달아났는데 사람이 아닌 ‘들짐승’ 수준이었다”며 “미군 사령관도 ‘언빌리버블(Unbelievable, 안 믿겨짐)’이란 말을 연발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훈련법을 공개했는데 이는 우리군 특수부대의 훈련에도 곧바로 적용됐다.

반면 남쪽은 상황파악이 안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권 전 사령관은 “눈에 안 보이는 적이 가장 무서운 적”이라며 “한밤중에 기어들어오는데 우리는 물론 미군도 전혀 상황파악이 안되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도대체 몇 놈이 들어왔는지, 사단 병력이 넘어왔는지, 전면전 상황인지 아니면 전초전인지에 대한 파악이 전혀 안됐다”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3시간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끝마치면서 기자는 “박 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박 대통령을 안 것은 5·16 전”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대구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만난 기억이 납니다. 5·16 전만 해도 우리 군대는 정말 형편없었어요. 장군들 배가 나오면 ‘각하, 인격이 나왔습니다’하고 서로 웃던 시절이에요. 장군들은 튀어나온 배에 쌍권총 차고 가죽점퍼 입고 지휘봉 들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당시 박 대통령은 ‘왕따’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말 수도 별로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권 전 사령관은 “박 대통령은 부하들을 잘 챙겨줬다”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한번 부대시찰을 오면 ‘임자 받아둬’하며 안주머니에서 당시 돈 500만원을 꺼내서 ‘이 돈은 임자만 써’하고 부하들을 많이 챙겨줬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돈 500만원은 지금 돈으로 5000만원 정도 되지 않나 싶다”면서 “그 돈으로 휘하 병력들도 먹이고 사기도 올려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5·16 주체세력인 김종필 전 총리와도 친분이 있는 권성근 전 사령관은 “JP(김종필)가 ‘꿈과 이상’을 그리는 사람이었다면, 박 대통령은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고 비교하며 설명했다. “사람이 무섭다는 것은 ‘독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양반(박 대통령)은 때린다면 때리고, 맞으면 반드시 돌려주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결국 작전이 취소된 것은 나 개인적으로 보면 다행한 일이겠죠.”

공군본부 작전과장, 작전국장, 초대 공군 군수사령관과 작전사령관 등을 역임한 권성근 전 사령관은 1945년 광복 직후 공군 창설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광복 전인 1943년 일본 육군 소년비행학교에 입교해 조종술을 익힌 권 전 사령관은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로 강제 차출됐다. 당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전선에 배치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일본 도쿄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직후 한동안 교편을 잡다 공군 창설에 투신해 6·25전쟁 때 L-4/5(속칭 잠자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고, 이후 우리 공군의 제트전투기 도입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후 1969년 판문점 정전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를 역임한 권 전 사령관은 지난 1970년 공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그는 전역 후에도 공군 참전군인회장, 보라매회장(공군 전역군인회장) 등을 맡으며 군 관련 일에 목소리를 높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