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박사의 한국 核개발 참여 과정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 10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계기에 새삼 이휘소박사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너무 아까운 인재에 가슴이 아리기도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이 휘소박사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교 2학년 재학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수석 합격 화공과 2학년 재학중 도미, 마이야미대학 물리과로 편입, 피츠퍽대학 석사, 펜실바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27세에 프린스톤연구소 위원, 그 당시 미국에서 10명에 꼽히는 물리학자가 되었고, 28세에 뉴욕주립대학 정교수, 30세에 시카고대학 교수겸 페르미연구소 물리부장으로 취임 명실공히 세계 핵물리학자중 1인자로 부상했다 74년에 방한, 서울대에 AID 차관에 의한 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주었으며, 77년 주한미군 철수가 시간문제로 대두되자 조국에 장거리 유도탄과 핵무기개발원리를 제공하고 같은 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62년 국제 고에너지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할 정도의 이휘소박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핵 과학자 10명속에 끼이게 되었다 외국인으로 거기에 든 예는 과거에 없었고, 아직 국적이 "한국인"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낀 것은 특별한 예외에 속한 것이었다 국제 고에너지회의는 이탈리아의 프리에스트에서 7월 15일부터 45일간 계속되었는데 미국의 핵 과학자 10명이 거의 행사를 주도하였다 특히 이휘소가 프리스톤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 4개가 회의의 중심 과제가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백 여명의 학자중 이휘소가 가장 젊었다 당시 이휘소는 핵의 이론과 소립자의 단위와 그들의 생명의 기간 그리고 그 생명이 다른 것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강연을 했고, 세계석학전원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박수가 끝나자 이휘소는... "저는 미국 국민이 아직 아닙니다 저는 한국이라는 가난하고 분단된 국가에서 태어나 미국에 유학중인 사람입니다 제가 국적을 언제인가 옮길 줄은 모릅니다만, 핵을 만들고 핵을 이용하는 것은 일부 강대국의 전유물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핵을 저개발국가의 복지에도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핵을 전쟁무기로 생각하는 인식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휘소의 이 말에 모두 또 감격했다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기립박수를 하였다 기립박수를 받은 사람은 젊은 이휘소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국내신문에도 이휘소가 국제물리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한 기사가 일제히 나왔었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보는 박사학위 시험결과도 전체 평균 93점이었고, 차점 합격자의 평균 71점인 것을 계산한다면 엄청난 차이이다 펜실베니아대학 역사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고, 더구나 물리과 지망생 중 미국 전대학 역사에도 없는 점수라고 말한다 고아인쉬타인박사가 일하던 곳의 프리스톤 고등연구소의 프레이즈 박사가 찾아와 대담을 요청할 정도였다 귀하의 성적은 펜실베니아대학뿐만 아니라, 전 미국의 물리과 박사학위 지망생 중에서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성적이라는 게 저희 연구소가 검토한 결과입니다 특히 귀하의 시험지를 검토한 결과 새로운 이론의 전개나 학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본 연구소의 검토결론입니다 더구나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으로서 이런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묻는 이휘소와의 대담은 생략하고... 프레이즈박사는 정중히 이휘소를 연구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초빙을 하면서, 귀하를 만난 것이 영광입니다 더구나 저희 연구소에 오시게 된 것도 환영합니다 귀하가 미국에 있는 것도 참으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이휘소는 1960년 1월 프리스톤의 정연구원으로 들어갔다 특히 이휘소의 담당교수인 크라인교수가 기뻐해 주었다 세계 석학의 집결지인 프리스톤연구소에 30세도 안된 사람이 정회원(당시 25세)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대통령과 이휘소... 핵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했던 이 휘소박사, 박대통령이 보낸 편지... < 이휘소박사님, 안녕하십니까? 박사님을 뵈온 지 벌써 4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동안 박사님의 소식은 이 곳에서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본인이 선포한 유신에 반대한 것 때문에 저대로 많은 고민도 했습니다 본인은 언제까지 대통령직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본인이 대통령직을 그만 두느냐 계속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것은 국방에 달렸다고 사료됩니다 지금 나라는 어지렵고, 국방은 허술하고 언제 공산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박사도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에는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이미 미군철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일부대는 이미 철수를 끝낸단계이고, 지상군 17000명이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월남에서와 같이 한국이 공산화되어도 좋다는 전제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제 얼마후면 한국에 남아있는 핵도 철수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본인도 미국정부측에 몇 번 자제를 호소하고, 부탁도 하여 보았지만, 더 이상 구걸하는 것도 추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도 무엇하지만, 그래도 애원해서 들어줄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본인은 어떠한 일이라도 할 각오입니다 이박사님도 아시다시피 본인이나 한국정부가 요구해서 들어줄 단계도 이미 지났습니다 가능성도 없는 구걸 행각으로 국가의 이미지만 손상을 보는 추한 모습을 또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제인가는 이런 때가 오리라는 생각으로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독자적으로 유도탄 개발과 핵무기개발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재미과학자들을 본국에 초청한 것이나 귀국시킨 것도 이런 저의 뜻을 일부입니다 이박사님을 초대하거나 모시지 못한 것은 박사님을 초대한다는 것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결과나 마찬가지라는 중론에 못이기어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사실 박사님의 능력을 추앙하고 박사님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나 조국은 위태로와 졌고 사정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이미 카터와의 싸움은 시작이 되었고, 여기서 비굴하지 않고도 우리는 승리해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굴한 기운만 보이면 깔고 뭉게는 묘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의존하던 시대에 종막을 고할 때라고 사료됩니다 우리자체가 독자적으로 미사일개발, 핵무기개발, 인공위성개발까지 해서 감히 누구도 우리를 넘볼 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시는 6.25의 쓰라린 경험 같은 것을 맛보지 않게, 우리 백성들이 전쟁으로 살상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이박사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이휘소박사님, 조국을 건져 주십시오. 74년엔가 박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이박사를 보호하기 위하여는 60만 대군이라도 동원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진심입니다 우리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이박사의 마음에 달리어 있습니다 그 동안 재미물리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미사일개발부터 서둘렸고, 또 시험도 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박사님의 힘이 필요할 때입니다 박사님의 처한 위치가 어떠한 지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도 조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눈뜨고 보고만 계시지만은 아니할 것입니다 이박사님께서 조국을 위해, 한 번 일어서 주십시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은 상황 앞에서,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절대 위기의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박사님께 애원합니다 박사님의 건강과 가운이 길이 빛나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1977년 3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 정 희 배상 편지는 이렇게 끝나 있었다 이휘소는 편지를 읽으면서 참담한 심경 속에 사로 잡히었다 암담한 기분이었다 이휘소는 그날 (1977.3.20) 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조국이 나를 필요로 할 때라는 절박한 내용이었다 내가 핵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은 처음에는 적성에 맞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나의 목적은 핵연료를 이용한 인류의 구원이었다 핵에너지를 이용한 자원의 개발, 자원의 새로운 창조는 무한히 열리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에 내 생애를 바치었다 또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니, 지금 조국이 내가 겪은 6.25나 그보다 더한 비극의 문턱에 있다고 판단되었을때,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미국은 월남에서 손을 떼었고, 또 한국에서도 손을 떼고 있다 명백한 사실은 조국이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철수...조국의 공산화...이런 것을 보면서 핵을 자원의 개발에만 목적을 두었던 나의 신념이 흔들린다면...그것은 잘못된 판단일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조국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의 원리를 제공한다면...그것이 조국을 지키게 하는 힘이 된다면... 비록 박대통령이 유신을 철폐하지 않을 경우라도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의 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르지만...죽는다... 내가 죽음으로 조국을 살릴 수 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죽어 조국이 조국으로 남고,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면...나는 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일까? 하늘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너만이 지금 너의 조국을 구할 수 있다는 명으로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일까? 조국은 나에게 너는 너의 능력을 이때에 쓰지 않으면 너는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살신성인...견위치명...멸사봉공...진인사대천명...나의 운명... 어머니...아내, 아이들, 그리고 형제들...하늘이여...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를 안내하여 주소서...> 이 책을 읽으면서 박대통령과 이휘소박사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 박대통령의 두번째 편지... < 이휘소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지난 번 편지를 받으셨을 것 입니다 무례한 것 여러가지 용서하십시요 제가 박사님께 편지를 띄운 후 이십 여일 동안 미국은 저나 한국정부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미사일부대 완전철수에 이어 지상군 17000여명을 철수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해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박사님께서 지금이라도 귀국하여 주십시오 박사님이 한국에 계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합니다 박사님의 귀국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간은 절박하고 상황은 급박하여 졌습니다 다시는 미국측에 비굴할 수도 없고, 비굴하지도 않겠습니다 박사님, 다시 청하오니, 귀국하여 주십시요.> 1977년 4월 8일 대한민국대통령 박 정 희 배상 이휘소는 하얗게 밤을 새웠다 그리고 스케줄을 더듬어 보았다 4월 8일 하바드대학특강. 5월 20일 동경제대학술회의 참가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성단계에 있는 "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이란 방대한 논문도 며칠내로 마쳐야 한다 이휘소는 광적으로 논문에 매달렸다 이 논문은 특히 Dimu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Quigg Thacker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전개한 논문이다 4월 25일 탈고를 끝낸 이휘소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버드대학에서의 특강을 끝내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마음으로 5월의 동경대학에서 있을 학술회의를 기다렸다 1977년 5월 15일, 이휘소는 시카고 변두리에서 외과의 개업을 하고 있는 김박사를 찾아갔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사실은...의논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솔직히 그 동안의 상황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조국의 현실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의 성능까지 설명했다 북한은 소련에서 수입한 사정거리 50Km가 되는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50Km라면 휴전선에서 서울은 물론 수원 인천까지 미치는 거리다 휴전선에서 한강다리 전부를 파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이다 그럴 경우 무기가 없거나 상대에 못 미치는 무기를 가지고 덤빈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이미 시작했고 다시 미국에 사정하고 애걸하는 것은 한국정부에서도 할 일이 아니며, 그런 꼴을 이휘소도 보고 싶지 않다 74년에 귀국했다가 박대통령의 부탁으로 당시 미국내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주한미군철수정책을 시정하여 달라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찾아다니기도 한 나로서도 다시 그럴 수는 없다 이휘소는 대강 이런 설명을 하고 투명용지에 쓴 서류를 내밀었다 가로 10여센티 세로 4센티 정도로 밀봉이 되어 있는 문서였다 그것은 이휘소가 따로 정리한 것을 다시 50분의 1로 축소하여 만든 정밀하고 치밀한 계산서였다 "이것을 다리의 뼈 속에 넣어 주십시오." "건강에나 몸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 "얼마 동안은 지장이 없겠습니다만..." "박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십시오." 김박사는 침통하게 이휘소를 바라보았다. 김박사가 만류한다고 이휘소가 자기의 결심을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온 것도 평소부터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이휘소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항상 교포사이에는 긍지와 자랑이었다 김박사는 다른 의사와 간호부까지 출입을 금지시킨 가운데, 이휘소의 다리에 마취주사를 꽂았다 살이 베어지고...소독이 된 서류를 안치하고... 수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휘소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휘소가 발표한"히고스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은 물리학계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었다 살람교수(78년 노벨상수상)는 물리학에 새로운 경지의 논문리라고 극찬했고, 세계의 핵과학자들은 다투어 이휘소의 논문을 구하려고 하였다 1977년 5월 19일 동경에 도착한 이휘소... 다음 날 발표할 학술논문을 정리하고는 한국 청와대에 전문을 쳤다 "5월 21일 PM11시 정각 나리다공항 대기" 나리다공항 KAL 안내소에는 몇 명의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휘소가 비행기에 오르자, 바로 출발하였다 한 시간이 좀 지난 후 김포공항에 내리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는 청와대정원에 내려 앉았다 박대통령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바로 지하실로 내려간 이휘소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사 두 사람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되었다.수술은 간단히 끝났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다리 속에서 빼어낸 곁에는 피가 번진 문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박사...고맙소...이박사" 박대통령은 그 피가 뭍어있는 밀봉된 문서를 얼굴에 갖다대고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휘소는 바로 헬기를 탔고, 또 지체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 이휘소는 동경제대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강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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