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상륙작전으로 전쟁초기 기습공격과 엄청난 전투력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한 북한군은 UN군의 참전과 국군의 반격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때 맥아더장군은 낙동강전선에서 위기를 타개하고 북한군의 배후를 강타한다는 내용의 작전구상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이 계획은 맥아더장군이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무렵 구상되었던 작전으로 미지상군을 수원부근에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북한군을 포위 격멸하려는 블루하트(Blue heart)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막지 못해 상륙부대는 내정하였던 미 제1기병사단을 전선에 투입하게 되므로써 이 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이후 계속적으로 연구 발전시켜 「계획 100-B(인천)」, 「계획 100-C(군산)」, 「계획 100-D(주문진)」의 3개안 중 낙동강에서 반격을 취한다는 「계획 100-B(인천)」가 채택되어 9월15일을 예정으로 한 크로마아트(Chromite) 작전계획이 수립되었다.
상륙예정지인 인천은 서울에서 서쪽으로 32Km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고 , 수도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적에게 심리적으로 타격을 가 할 수 있는 한편, 남한 깊숙이 투입된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으며,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을 실시함으로 북한군 주력을 압축 섬멸함으로써 소수의 희생으로 다대한 성과를 획득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이 시행될 인천항은 많은 난점을 안고 있었다. 즉,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좁은 단일수로로서 대규모 함정의 진입이 불가능하고, 적이 기뢰를 매설할 시 많은 피해가 예상되며, 조수간만의 차가 10m내외로 심하고, 지형 등 자연적인 불리한 조건과 병력, 탄약, 보급품의 운송 등 작전을 지원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따라 합동참모본부와 해군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고, 대안으로 군산이나 아산만 해안의 포승면 일대로 상륙지점의 변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적은 후방을 무시하고 있고, 병참선이 과도하게 신장되어 있으므로 서울에서 신속히 이를 차단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전투부대는 사실상 낙동강 일대의 제8군 정면에 투입되어 훈련된 예비 병력마저 없어, 전세를 회복할 능력이 거의 없다”라고 설명하였고,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중요한 수도 서울을 단 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는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결단으로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작전계획」을 승인 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편성된 상륙부대로 미 제10군단을 창설하여 군단장에는 알몬드 소장을 임명하고, 예하에 미 제1해병대 사단(사단장 스미스 소장)과 미 제7사단(사단장 바 소장), 국군해병연대(사령관 신현준 대령), 국군 제17연대 (연대장 백인엽 대령)등 총 병력 75,000여명으로 편성하였고, 이들의 임무는 인천항의 확보와 해안교두보 점령, 가능한 한 신속히 진출하여 김포비행장 확보, 한강도하 및 서울 탈환, 미 제8군단과 연결작전이 이루어지기까지 서울 근교의 진지 점령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상륙지역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중폭격이 9월 4일부터, 9월15일까지 계속되었고, 9월13일부터는 4척의 항공모함과, 6척의 구축함, 5척의 순양함이 인천만 어구에 들어서 월미도를 포격하기 시작 하였으며, 9월 12일에는 군산에 양동작전을 감행하였고, 동해안에는 9월14일 ,15일 양일간에 걸쳐 삼척일대 포격을 가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한군의 인천지역 병력규모는 지역 경비대대를 포함하여 약 2,000여명에 달하였고, 서울-인천 지역에서 활동 중인 적의 병력은 약 10,000여명으로 판단되었다.
9월15일 새벽, 제7합동기동부대 스트러블 해군제독의 지휘아래 항공모함, 구축함, 순양함 등 8개국 261척(미국225, 영국12, 캐나다3, 호주2, 뉴질랜드2, 네덜란드1, 프랑스1, 한국15)의 함정과 제10군단으로 편성된 대규모선단이 인천앞바다에 집결하였고 월미도에 상륙 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가 인천수로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해군정보장교 클라크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05:00부터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상륙주정(LCVP)20척에 분승하여 인천상륙을 감행하여 제1파 7척이 예정보다 3분이 늦은 06:33에 녹색해안(Green Beach)인 월미도에 상륙, 연이어 후속파가 도착하였다.
이어 월미도 정상의 105고지를 향하여 공격을 개시하였고, 일부는 인천 내륙으로 이어지는 방파제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차단하였다. 06:55에는 105고지 정상을 탈환하였고, 08:00 월미도를 확보한 후 소탕작전으로 들어가 정오쯤 완료하였다. 월미도 상륙 시 미 해병대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이었으며, 적 사살 108명, 포로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날 오후 만조가 되면서 적색해안(Red Beach),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할 미 해병대 제1연대, 제5연대 전투단 병력을 태운 함정들이 인천항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우중에도 불구하고 미 해병대 및 해군 항공기는 인천 및 경인 국도를 연결하는 내륙지역에 대한 도로와 목표물에 대하여 계속하여 차단 공격을 가하였고, 해군 함포지원전대가 맹렬히 포격을 가하는 동안 돌격상륙부대인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1연대 제3대대는 적색해안을, 미 제1해병 연대는 청색해안을 향해 돌격하였다.
17:33 미 제5해병연대는 적색해안(동구 만석동 부근)에 상륙하였다. 계획된 시간보다 3분이 늦은 시간이었다. 상륙한 병력은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를 올라갔으며 일부는 해군 포격으로 파괴된 방파제 사이로 상륙하였다. 상륙지역 북측으로 상륙한 해병대는 해벽 후면의 적과 교전하여 8명이 전사하고 28명이 부상하였다.
한편, 청색해안(남구 용현5동)의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예정시간 보다 2분이 늦은 17:32분에 상륙을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병력들은 높은 해벽을 기어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 청색해안은 적의 저항이 없었기 때문에 큰 피해는 없었고, 공격목표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국군 해병대 제1연대는 15일 20:00에 적색해안에 상륙하여 시가지 소탕전과 외곽 경비를 담당하였다. 이날 작전에서 돌격 상륙부대의 피해는 전사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이었고,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여명이었다.
인천해안교두보를 확보한 미 해병대 제1사단은 9월16일부터 한강으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9월 18일부터 후속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상륙하여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고, 9월27일 한국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하여 9월 28일 수도 서울은 90일만에 수복되었고,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작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