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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역사

동 아 2007. 10. 22. 00:06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문헌에는 김치를 가리키는 저(菹)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채소를 즐겨 먹었고 소금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사실과 역사적으로 젓갈, 장 등의 발효식품이 만들어진 시기 등을 고려할 때 삼국시대 이전부터 김치류가 제조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김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
은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高句麗條)에 있다. '고구려인은 채소를 먹고, 소금을 멀리서 날라다 이용하였으며, 초목이 중국과 비슷하여 장양(藏釀, 술빚기, 장·젓갈 담기)에 능하다'고 하여 이 시기에 이미 저장 발효식품이 생활화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 本紀) 시조(始祖) 동명성왕조(東明聖王條)에도 고구려인들이 채소를 먹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다.

삼국시대 경
에는 마늘(三國史記), 가지(海東繹史), 오이(三國遺事) 등의 채소가 식용됐음을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당서(唐書)에 '삼국의 식품류는 중국과 같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중국의 '제민요술'(齊民要術)에 열거된 오이, 박, 토란, 아욱, 무, 마늘, 파, 부추, 갓, 배추, 생강, 가지 등을 우리 나라 사람들도 즐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의 김치는 순무, 가지, 부추, 고비 등을 소금으로만 절인 형태였다. 이 외에 채소를 장이나 초, 술지게미에 절인 형태, 소금과 곡물 죽에 절인 형태 등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이는 오늘날의 장아찌형 절임법인데, 풍부한 해산물과 양질의 채소, 훌륭한 발효 기술을 바탕으로 장아찌형 김치무리와 생선·곡물·채소·소금으로 만들어진 식해형 김치무리가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백제 유적 중에서도 김치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들이 있는데, AD 600년경 창건된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높이 1m 이상의 대형 토기들이 그것이다. 승려들의 거처에서 발견된 이들 토기들은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어서 의도적으로 땅속에 묻어두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겨우살이에 대비한 김장독과 같은 용도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삼국시대 김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또 AD 720년 신라 성덕왕 19년 세워진 법주사 경내의 큰 돌로 만든 독은 김칫독으로 사용됐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장의 기원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민간에까지 불교가 성하여 육식을 절제하고 채소요리를 선호하였다.
김치를 뜻하는 '저'(菹)라는 글자는 '고려사'(高麗史)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우리나라 김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고려사 제60권 예지(禮志) 제14권 새벽관제 제사를 올릴 때의 진설표에 저(菹) 4종(부추저, 순무저, 미나리저, 죽순저)이 나온다.

장아찌 형태에 머물렀던 삼국시대와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채소재배 기술의 발달에 따라 동치미, 나박김치 등이 새롭게 개발되었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가포육영'(家圃六泳)에는 '무청을 장 속에 박아 넣어 여름철에 먹고 소금에 절여 겨울철에 대비한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이는 장아찌와 김치가 개념적으로 분리돼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겨울을 대비한다는 것으로 보아 김장의 풍습도 이미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이때의 소금에 절인 김치류는 오늘날 짠 무를 물에 희석하여 먹는 나박지, 동치미 등 침채류라 할 수 있다.

이같이 삼국시대 장아찌류, 곧 채소절임에 머물렀던 김치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장아찌류와 동치미·나박김치류로 분화·발달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인 '규곤시의방'(음식디미방)에 언급된 '산갓김치' '오이지' '나박김치' 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일 수 있다.
더불어 고려시대에는 오이, 부추, 미나리, 갓, 죽순 등 김치에 들어가는 채소류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단순한 소금절임 형태에서 벗어나 파, 마늘 등 향신료가 가미된 양념형 김치도 등장하였다.

고려 말 이달충(李達衷)의 '산촌잡영'(山村雜詠)이란 시에는 '여귀풀에 마름을 넣어 소금 절임을 하였다'는 구절이 있어 김치류 야생초를 이용하여 제철 김치의 맛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 '목은집'(牧隱潗)에도 '침채'(沈菜), '산개염채'(山芥鹽菜), '장과'(藏瓜, 된장에 담근 오이 장아찌) 등의 표현이 나온다.
여기에서 김치란 우리말의 직접적인 한자 표기인 '침채'(沈菜)가 선보이며, 장아찌가 문헌상으로 처음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한편 고려사 예지에는 `근저(미나리 김치)', `구저(부추김치)', `청저(나박김치)', `순저(죽순김치)' 등의 김치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은 제향음식(祭享飮食)과 관련된 김치류 외에도 더 많은 종류가 있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 인쇄술의 발달에 따른 농서(農書)의 폭넓은 보급 덕분에 채소 재배 기술이 향상되었다.
또 외국에서 여러가지 채소가 유입되어 김치 재료가 더욱 다양해졌고 여러 형태의 담금법도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조리 방법을 기록한 여러 문헌에는 순무, 무, 오이, 가지, 동아, 산갓, 죽순, 파 등이 김치의 주재료로 쓰이고 있다.
김치는 각 지역 산물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였기 때문에 향토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한편 꿩(생치, 生稚)이 김치의 재료로 이용되는 등 채소에 육류가 가미된 형태를 보여 주기도 한다.
단순 절임의 장아찌형과 싱건지 형태의 김치가 있었으며 나박지형, 동치미형 물김치까지 골고루 등장하고 있다. 김치의 국물색을 낼 때는 맨드라미나 연지 등으로 붉은 색을 내기도 하였다. 또 양념 사용이 많아져 주재료와 부재료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고추와 배추, 젓갈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고, 침채원은 소금, 된장, 밀기울이었다.
담금법에 따라 나박김치 동치미형, 신건지 짠지형, 섞박지 소박이형, 장아찌형 등 4가지가 있었으며, 그 중 장아찌형이 가장 많고 다음이 신건지형이었다.

조선시대 중기에는 고추가 유입되어 김치 양념의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고추는 일본을 거쳐서 도입된 남방식품으로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0권에 따르면 광해군 때부터 널리 보급되었다고 하니 그 전래시기는 16세기 말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재배보급에 성공하여 고추가 김치에까지 사용된 것은 훨씬 후이다.
김치에 고춧가루를 사용한 것은 오이김치(山林經濟 1715)가 최초였다. 김치에 고추가 들어가면서 젓갈도 다양하게 쓰이게 되었는데, 식물성 재료에 동물성 재료를 첨가하여 맛과 영양의 조화를 이루고 김치의 감칠맛을 더욱 향상시켰다.

조선시대 말에 이르러 통이 크고 알찬 통배추가 이 땅에서 육종 재배되기 시작(是議全書 19C말)하여 무와 오이, 가지에 앞서서 배추가 김치의 주재료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기 김치의 변화는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와 '임원십육지'(林를園十六志)에 잘 기록돼 있다.
'증보산림경제'에 소개된 김치류에는 고추가 양념으로 쓰이고, '임원십육지'에 소개된 김치류에는 젓국지가 등장한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이미 김치에 젓갈을 사용한 기록이 나오지만, '임원십육지'의 젓국지가 더 구체적이다. 김치 담그는 법도 장아찌형, 물김치형, 소박이형, 섞박지형, 식해형 김치 등으로 다양하게 발달하였고, 제조방법도 소금기를 뺀 뒤 김치를 담는 '2단계 담금법'으로 발전하였다.
1766년 발간된 '증보산림경제'는 무려 41종의 김치류가 다양한 형태로 수록되어 있어 매우 귀중한 문헌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오늘날 김치의 대명사인 통배추김치가 `숭침채'(  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 김치는 생선과 고기가 곁들여진 것이 특이하다.
또 무의 뿌리와 잎이 한데 붙은 채로 담근 총각김치의 원형이 선보이며 가지, 오이의 세 면에 칼집을 내서 고춧가루와 마늘 양념으로 소를 채운 소박이형 김치, 배추를 무와 한데 섞어 담근 섞박지, 동치미 등이 문헌상 처음 소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