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라이프매일 테마포커스 "세기를 넘어선 아이콘, 박정희" 080417

동 아 2008. 4. 19. 22:30
라이프매일 테마포커스 "세기를 넘어선 아이콘, 박정희" 0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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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세기를 넘어선 아이콘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올해로 29년이 됐다. 한 세대에 해당하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박정희란 인물은 아직도 대한민국에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박 대통령은 아직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다. 역대 대통령 중 국민들로부터 가장 훌륭한 평가를 받는 인물도 바로 박 대통령이다.

지금의 정치·경제 상황이 박 대통령에 대한 신드롬과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는 분석도 있다. 조금 더 비약하면 박정희란 인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특히 박 대통령의 고향인 대구경북에서 그는 훌륭한 자산이면서,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흔적을 찾아가 본다.

“대한민국이라는 큰 배가 이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데 이어 이번 ‘4`9 총선’에서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친박연대 및 친박무소속연대 등 이른바 보수로 분류되는 당선자들이 200명을 넘어 ‘보수천하(保守天下)’가 되자 정치권 안팎에서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오는 말이다. 김대중-노무현으로 대표되던 지난 10년 동안의 진보의 시대가 저물고 보수, 더 나아가 성장을 기치로 내건 시대가 활짝 열렸다는 것이다.

‘진보에서 보수로의 대전환’을 이끌어 낸 17대 대통령 선거 및 18대 총선 결과를 찬찬히 뜯어보면 ‘박정희 신드롬’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물론 친박연대, 친박무소속연대 등 그녀를 따르는 60여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배출해 가장 큰 승리자란 평가를 받은 박근혜 전 대표.

물론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이 승리를 거두는 데 가장 큰 토대가 됐지만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드롬과 향수, 그리고 박정희 후광이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거 막판에 한나라당이 박 전 대표의 여동생인 근령씨를 긴급 투입, 박정희 신드롬 표잡기에 나선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경제를 표방하고 경제살리기를 외치며, 청와대 입성에 성공한 이명박 대통령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 이미지가 오버랩되면서 적지 않은 득을 봤다는 분석도 많다.

그 적절성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박정희-이명박-박근혜 세 사람에 대한 한 진보진영 학자의 표현은 한번쯤 곱씹어볼만하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박정희의 두 얼굴일 수 있다. 극우 반공주의적 박정희가 박근혜라면, 강력한 개발주의적 박정희는 이명박인 것이다.”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쫓았다’는 삼국지처럼 보수로 회귀한 한국 정치지형의 큰 변화엔 29년 전 세상을 떠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분명히 일조한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는 아직 살아 있다”라는 화두가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불기 시작했던 출판계의 박정희 신드롬도 갈수록 맹위를 떨치고 있다. 대형 서점 신간 코너에 가면 ‘살아 움직이는 박정희’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것. 국내외에서 출간된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책이 600여권에 이를 정도다. 지난 해 출간된 ‘박정희 다시 태어나다’란 책의 표지는 “육영수 여사가 평소 좋아했던 목련을 모티브로 디자인했다”는 설명과 함께 ‘포스트 박정희 신드롬의 도래’를 강조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그 옆에는 ‘박근혜 신드롬’ ‘카리스마 박근혜’라는 제목의 책들도 보여 부녀지간에 정치적 자산을 대물림하는 느낌을 줘 흥미롭다.

국민들로부터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도 단연 박정희 전 대통령. 얼마전 전반적인 국가발전에 기여한 대통령을 묻는 질문에 10명 중 8명(79.8%)이 박 대통령이라고 답했다. 다른 대통령들은 한자릿수에 불과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대왕세종’에서 티저 홈페이지를 운영할 때 했던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세종대왕과 가장 닮은 대통령이 누구라 생각하느냐는 물음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머물고, 지나간 자리
대구와 구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년과 청년 시절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고, 대통령 당선 이후는 물론 사후까지 그와의 뜻 깊은 인연을 이어간 곳이 부지기수다.
매일신문에 대구이야기를 연재한 정영진씨는 '박정희와 대구의 인연' 편에서 "평생의 처세훈을 닦게 해준 학창시절(1932~37년 대구사범학교)의 대구를 그가 잊을 리 없었다"고 말한다. 박 전 대통령은 또 1950년 12월12일 동인동 육군본부(현 한국은행 대구경북본부)의 정보참모(중령)로 근무하며 육영수 여사와의 결혼식을 중구 계산성당에서 치렀고, 52년 2월2일 삼덕동 신혼집에서 첫딸 근혜를 얻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돼서도 대구와 박 전 대통령(이하 박 대통령)의 인연은 계속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소는 대구 지산동 수성관광호텔. 박 대통령은 대구에 내려올 때마다 수성관광호텔 2층에 마련된 집무실에서 묵었다. 호텔에 묵기 하루 전날 비서진을 미리 대구에 보내 엄선된 막걸리를 말통으로 사게 했고, 회식자리 때마다 막걸리 폭탄을 돌린 일화로 유명하다. 당시 수성관광호텔에 근무했던 유영진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막내 시절이라 대통령 근처에도 가기 힘들었지만 삼엄한 경호에 방탄문까지 달았던 기억이 난다"며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까지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가 1990년대 들어 대통령의 방으로 불린 방을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고 귀띔했다. 김경복 수성관광호텔 전무는 "예전에 대통령들이 묵을 땐 호텔 전체를 사용했던 것으로 안다"며 "2002년 리모델링 공사를 통해 대통령 방을 비롯한 모든 호텔 인테리어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했다.

동대구로와 히말라야시더 또한 박 전 대통령에 의해 탄생했다. 범어네거리~파티마병원 2.7㎞ 구간의 동대구로 공사는 박 대통령의 특별 지시와 각별한 관심 아래 진행됐고, 중앙분리대에 심은 히말라야시더 또한 그가 가장 좋아하던 나무로 지금까지 대구를 대표하고 있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수성구 중동 '광명 프레지던트' 아파트와 대구컨트리클럽 역시 박 대통령과의 인연이 묻어 있는 곳이다. '광명 프레지던트'는 당시 대구 제일의 건설회사로 유명했던 '광명건설'이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프레지던트'라는 이름을 붙여 화제가 된 곳. 박 대통령이 수성관광호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생전의 관심이 컸고, 당시로서는 대구에서 가장 높은 13층의 위용을 자랑했다. 이곳 관리소장은 "박 대통령 생전에 아파트를 짓다가 실제 입주는 대통령 서거 후 1980년 이뤄졌다"며 "공교롭게도 광명 건설 또한 입주 당시 부도가 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후 박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는 대구에서 초급 장교를 지내며 '광명 프레지던트'에 묵기도 하는 등 박씨가와의 인연은 오랜동안 이어졌다.

1972년 10월 개장한 대구컨트리클럽은 박 대통령이 'VIP 1호'로 등록된 골프장이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골프를 치며 주요 인사들을 자주 만났고 대구컨트리클럽엔 이 같은 용도의 접견실이 따로 있었다. 이곳 역시 아버지로부터 회원권을 물려받은 지만씨가 가끔 골프를 치러 내려와 아버지를 추억하는 등 박 대통령 사후에도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박 대통령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곳은 구미 금오산이 아닐까 싶다. 박 대통령이 태어난 생가가 금오산 남향 기슭에 위치해 있고, 호연지기를 키우여 웅심을 품은 곳 또한 금오산이기 때문이다.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있거라. 세번째 못이룬 성공 이룰 날 있으리라. 대장부 일편단심 흥국일념 소원성취 못하오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1961년 5월 박 대통령이 제2군 부사령관으로 대구에 재직하다 비행기로 금오산 상공을 지나며 남긴 메모가 당시 그의 심정을 잘 말해준다. 이 메모는 훗날 박 전 대통령 재임시절 '금오산아 잘 있거라'는 노랫말로 한 트로트 가수 앨범에 수록되기도 했다.

한편 대구 남구 대명동 앞산 자락에 위치한 보문사는 박 대통령을 추억하는 새 명소가 될 전망이다. 20일 보문사 대웅전에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을 안치하는 행사가 열린다. 주지 보각 스님은 "불교 신자였던 박 대통령 내외의 영정을 모신 사찰이 전국에 몇 곳 있기는 하지만 대구경북에서는 처음인 것으로 안다"며 "불교 포교 사업과 결식아동돕기, 무료급식 등의 봉사활동을 함께 펼쳐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생가를 찾는 사람들
박 전 대통령 생가는 1993년 경북도 기념물 86호로 지정됐으며, 사랑채·분향소·관리사·주차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900년 즈음 지어진 이 집에서 1917년 태어나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오전 9시~오후 5시30분 개방되는 생가에는 박 전 대통령이 어린 시절 사용하던 책상·책꽂이·호롱불 등이 남아있고 1929년에 모친과 같이 심었다는 감나무가 버티고 서있다. 장조카인 박재홍씨 소유였던 생가는 소유권이 1996년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로 이전된 뒤 2003년 2월 구미시 소유가 됐다. 김 전 보존회장 피살 이후 새로운 보존회장 추대를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찾을까? 구미 인구 40만명. 박정희 생가 1년 방문객 수는 이를 훨씬 넘어선 50만명에 이른다. 지금도 하루평균 1천300여명이 생가를 찾아온다. 이미 30년 전 세상을 떠난 대통령의 생가에서 과연 어떤 이들이 무엇을 찾고 싶어하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18대 총선 하루 전날인 8일, 박정희 생가를 찾았다.
김재학 박정희생가보존회장 피살사건이 있은 후 보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였다.

안동에서 15명의 동네친구들과 함께 생가를 찾았다는 강우중(78)씨는 생가 앞 표지판을 꼼꼼히 읽어보며 친구들과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 대통령을 많이 존경했었지요. 살아계셨다면 91세 이시겠네요.”

강씨 할아버지 일행과 생가에 들어섰다. 대구에서 온 김지영(55)씨는 오랫동안 오고 싶었던 곳이라며 감개무량해했다. “육 여사, 박 대통령 서거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짠해요. 아직도 살아계신 것 같이 생생한데….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박 대통령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어요?” 김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추모관에서 나왔다. 50대 이후의 방문객들은 저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나누면서‘보릿고개를 해결한 사람’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그러면 젊은층의 생각은 어떨까. 아버지와 함께 울산에서 왔다는 엄대석(34)씨는 정치인들에게 박통의 후광보다 실질적인 정치능력을 주문했다. “카리스마, 추진능력 측면에서 대통령으로서 대단한 인물이죠. 어른들에겐 ‘왕’의 개념인 것 같아요. 박근혜씨도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박정희 대통령의 큰 딸 이미지가 강하죠. 선거 때마다 박 대통령의 후광을 입으려는 정치인들이 많은데, 그건 별개 아닌가요? 정치 능력을 살펴봐야죠.”

방명록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더 사셨으면 세계 1위 국가’,‘00후보에게 영광을 주십시오’, ‘생애 끝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민족의 영웅이시여’, ‘그립습니다’, ‘민족의 주린 배를 채워 주신 님이여’ 등 존경어린 문구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주소도 각양각색. 그날 하루만 해도 전남 완도를 비롯해 서울`부산`울산`대전`안양`김제 등 전국 각지로 표시돼 있었다.

최근 보존회장 피살사건 이후 방문객이 더 늘어났다. 최미숙 문화해설사는 “400~500명은 기본이고 많을 때는 1천명 이상이 다녀간다”고 전했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는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부쩍 잦아졌다고. 최씨는 “경제가 어려우니 박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이 더 짙어지는 것 같다. 박근혜에 대한 동경도 결국 박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된 게 아니겠느냐”는 나름의 분석을 내놨다.

정치인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대선 때는 이명박`이회창 후보가 생가를 찾아 참배하기도 했다.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도 생가는 문전성시였다.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에 탈락한 친박 의원들이 수시로 생가를 찾았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생가 방문 때는 1천여명의 지지자들이 몰리기도 했다. 박 전 대표는 정치 역정의 주요 고비 때마다 아버지 생가를 찾아 마음을 가다듬곤 한다.

박정히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구미을에서는 친박무소속연대 김태환 의원이 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당히 당선되기도 했다.

이날 한 시간에 걸쳐 2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이들은 진지하고 경건한 표정으로 생가를 둘러봤고 50대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관광버스를 이용해 단체로 오는 경우도 많았다. 정기를 받기 위해 박 전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사진이 박혀있는 휴대폰 액세서리를 구입해 가는 사람도 종종 눈에 띄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16년 동안 지켜본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판단이 빠르고 추진력이 강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랫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고, 고생한다며 위로하는 등 따뜻한 마음도 보여주신 어른이었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3년부터 인연을 맺어 79년 서거할 때까지 청와대 경호실 등에서 근무했던 정수회 중앙협의회 류병률(67) 이사장. 군대시절을 뺀 16년 동안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셨던 그는 “농민들과 같이 모를 심으면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는 등 사람들과 격의없이 어울렸던 소탈하신 분”이라며 박 대통령을 회고했다.

경호실에서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의 안전관계 일을 맡았던 류 이사장은 지금도 79년 10`26 당시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26일 밤 퇴근하고 서울시내에 있는데 오후 10시30분쯤 대통령이 서거하셨다는 연락을 받았지요.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어요.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듯한 충격이었습니다.” 류 이사장은 “경호실에서 어려운 일을 마친 후에는 직접 담당 직원을 불러 격려하시는 일도 더러 있었다”며 “미술과 문학,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고 덧붙였다.

10`26 당시 박종규씨가 경호실장을 맡았더라면 대통령이 시해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얘기가 경호실 직원들 사이에 나돌았다고 류 이사장은 얘기했다. 2002년부터 박정희·육영수 기념문화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정수회 일을 하고 있는 류 이사장은 “그동안 국내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관한 책이 600여권이나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의 초석을 다진 분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새마을운동의 역사적 평가
해방 후 불과 반세기 남짓한 기간동안 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에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이룬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높은 교육열, 부지런한 국민성, 국가적 역량, 리더십… 등 성장 동력의 요인은 많다. 그러나 이 가운데 빼놓을 없는 것이 70년대 시작된‘새마을운동’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운동은‘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새마을운동의 기치=1970년 4월22일 박정희 대통령이 한 지방장관회의에서“지붕개량이 잘 되고 마을주변과 안길 등을 잘 가꾼 청도읍 신도리를 본보기로 우리나라의 마을과 국토를 잘 가꿔 보자”고 제안하면서 우리나라 농어촌 전역에 새마을운동의 기치가 올려졌다.(1975년 대통령 비서실 발간‘새마을’ 화보집)
돌이켜 보면 70년대 초반까지 농어촌 가구의 80%는 초가집이었고 전기가 들어온 마을도 채 20%도 안됐다. 마을마다 길은 좁고 구불구불해 경운기마저 다니지 못했으며‘퐁당 변소’와 허물어가는 흙 담장이 열악한 생활환경을 대변했다.
도농간 소득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이미 두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과로 농어촌에 만연한 빈곤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관점에서도 하루 빨리 퇴치해야 할 과제로 떠오른 시점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따라서 이 모든 문제점을 타파하기 위해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바탕으로 농어촌 개발, 생활환경 개선, 소득증대를 3대 핵심과제로 삼아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주민의 자발적 동참을 이끌어내게 된다.
마을 길을 넓히고 콘크리트 담장을 쌓고 전기공급에 이은 전화보급, 지붕개량과 사방사업을 통해 산사태와 만성 물난리를 막아 안정적인 농산물을 생산에 기여를 했다. 비만 오면 떠내려가던 섶다리, 돌다리도 정부지원과 주민 격려금제도를 통해 튼튼한 교량으로 대체됐다. 통일벼의 육성과 장려로 식량사정도 해결됐다. 전국의 농어촌을 기초·자조·자립 마을 등 3등급으로 나눠 정부지원금을 차등화하면서 주민들의 협동정신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38년이 흐른 현재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맞았다.

◆국가발전 브랜드로 뜨고 있는 새마을운동=10.26 이후 한동안 주춤했던 새마을운동은 최근 몇 년 사이 중국과 동남아 등 경제후발국들의 국가발전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 동티모르, 몽골, 필리핀, 러시아 연해주 등에서 한국의 새마을운동 정신과 시설지원을 통해 해당 지역민들의 의식전환 및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공무원들이 한국의 경험과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교육을 받기도 했다.
특히 중국은 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신농촌정책 토론회에서 새마을운동을 배워야할 운동으로 결정하고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500여명의 공무원을 한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경북도도 2006년부터 이러한 세계 각국의 새마을 운동에 대한 관심을 널리 보급하고자‘새마을운동 세계화 태스크포스팀을 구성, 국가발전프로그램으로서의 새마을 운동을 보급하는데 팔을 걷고 나섰다. 일례로 경북도는 베트남 타이응우엔성의 룽반마을에 새마을 회관과 보건소를 건립했다.

◆학문적 정립이 필요할 때=절대빈곤을 타파하는 핵심동력이 된 새마을운동은‘해방 이후 가장 잘된 정책 1위(광복 49주년 경향신문 여론조사)'에 선정된 바 있다.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에 영국이 200년, 미국 180년, 일본이 100년 걸린데 비해 우리나라는 32년 만에 달성했다. 나라 밖에선 개발모델로 활발한 벤치마킹도 이뤄진다. 새마을중앙회에 따르면 외국인으로서 새마을교육을 받은 사람은 92개국 2천200여명이 넘는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선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나 자료가 충분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관련, 영남대 최외출 교수는“새마을운동의 세계화가 필요하며 21세기형‘새마을학’을 정립할 때”라고 역설한다.
돌이켜 보면 새마을운동이 단순히 집을 새로 짓고 도로를 내는 것에 그친 게 아니라 70년대 국민의식개혁운동이자 경제성장 동력이었고, 이제는 21세기 지구촌의 문화교육 콘텐츠로 자리 잡아가는 마당에 국내에서 제대로 된 평가가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
그래서 올해 1월 최 교수는 '한국새마을학회'를 출범시켰다. 목적은 새마을운동을 △지역사회 발전이론으로 체계화하고 △전문요원을 양성, 국제봉사와 민간외교활동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 학회엔 53개 대학 17개 연구기관 및 23개 공공기관 151명이 참가하고 있다.
최 교수는“정부나 정권차원이 아니라 국가 미래 차원에서도 새마을운동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확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새마을운동, 후발국에 맞는 프로그램 개발 지원
최외출 영남대 교수
“새마을 운동은 농어촌에만 국한된 운동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살기위해 노력하고 협동하는 것입니다.” 한국새마을학회 최외출(영남대 지역·복지행정학과 교수)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새마을 맨’이다.

영남대 지역개밸학과 및 새마을장학생 1기(1976년)인 최 교수는 요즘 새마을에 대한 학제적 연구를 통해 학문적 논리와 이론개발, 그리고 개발된 이론에 기초한 실천모델 제시로 새마을학을 정착하는데 힘쏟고 있다.

“새마을운동을 배우려는 후발국에 대해선 무작정 지원하기보다는 그들의 욕구에 맞는 프로그램 개발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의료와 보건, 소득증대 방안, 교육사업 지원 등 모델의 케이스별 지원과 그에 따른 실패원인 분석 및 인센티브가 세계무대에서 우리나라 발전명품인 새마을운동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이 됩니다.”

최 교수는 이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 개발이 한국의 국가적 이미지 제고에도 한몫할 것임을 강조한다. 그는 이어 근면·자조·협동 등 3대 새마을운동 정신은 점차 유대의식이 엷어지고 있는 도시인들에게도 공동체의식을 높여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우문기기자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마케팅-밥상도 정치판도 향수 자극
▲대구 동구 둔산동에 '웃음이 묻어나는 자리'라는 간판을 내건 식당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진과 글을 보러 오는 손님들이 많다.
구 동구 둔산동 K2관사 입구에 위치한 한 식당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억하러 오는 손님들이 유난히도 많다. 구미 생가와 선친 산소를 찾거나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와 함께 한 모습 등 5,6점의 사진이 있고 서예에도 능통했던 박 전 대통령의 글까지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정란 사장은 "7년 전 가게 문을 열 때부터 액자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 사진들"이라며 "이 집에 가면 박통 사진이 많아 찾아오는 손님들이 여럿 있다"고 했다.
내년이면 서거 30주년을 맞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박통 마케팅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같은 마케팅 전략에는 박 대통령의 사진과 글을 '모셔' 놓는 게 가장 흔하지만 박통냉면·박통칼국수·박통막걸리 같은 '박통' 프랜차이즈도 부지기수다. 1998년 대구 뉴영남호텔은 박 대통령을 회상시키는 '박통냉면' 1호점을 동성로에 내 화제를 모았다. 냉면은 생전의 박정희 대통령이 즐겨 찾던 대표적 음식. 박통물냉면·새마을김치만두·상모리소고기수육·상모리녹두빈대 등 박통을 연상시키는 10여가지 메뉴에 동동주 등 향토적인 음식들도 곁들인 박통냉면은 전국체인점으로 명성을 떨치다 지금은 하나 둘 사라졌다. 대전 서구 탄방동의 박통냉면 한 종업원은 "전국에 남은 유일한 체인점으로 알고 있다"며 "식당 간판엔 아직도 박통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고 전했다.
박통막걸리 또한 박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하는 마케팅 전략. 박 대통령은 막걸리 애호가로 유명했다. 맥주와 막걸리, 소주와 막걸리, 사이다와 막걸리를 자주 섞어 마셨고, 각각 맥막·소막·막사이주라는 말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은 1998년 소떼 방북 때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요구로 박 대통령이 즐겨마다시던 고양막걸리를 가져가기도 했다. 이 같은 유명세에 힘입어 박통막걸리, 박통살얼음막걸리라는 이름의 전국체인점들이 아직도 여럿 있다.

박 대통령이 즐겨 먹지 않았어도 박통 자체가 마케팅 대상이 되기도 한다. 구미에 '박통칼국수'점을 차린 최근순 사장은 "박통의 고향 구미는 박통이라는 말 자체의 인지도가 높다"며 "3년 전 개업 당시 이 같은 인지도를 노려 마케팅 차원에서 박통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 했다. 성주 가천면 창천리 '꿩샤브샤브'식당에도 박정희와 육영수 관련 사진을 벽면에 여러장 붙여 손님들의 눈을 심심찮게 하고 있다.

박통 마케팅이 가장 치열했던 곳은 다름 아닌 정치판이다. 1997년 대선에서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해 탈당한 뒤 국민신당 후보로 나선 이인제 당시 후보는 '박정희 흉내내기'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에게 맞섰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까지 따라했다. 당시 경제위기와 맞물려 학계에서도 박정희 재평가 논쟁이 활발할 정도로 박정희 신드롬이 강했던 시류에 편승한 행동이었다. 한동안 조용했던 정치권의 박통 마케팅은 2007년 대선 때 다시 재현됐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대선 후보들이 너도 나도 앞다퉈 구미 박정희 대통령 생가 방문에 나선 것. 노무현 정부에 실망한 보수층이나 경기 침체에 고통받는 서민들에게 박정희 시대의 고성장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전략이었다.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와 MB]강한 추진력, 얼굴, 국민 기대 비슷
▲지난 대선때 박정희 대통령 생가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박 대통령의 사진을 보며 웃고 있다. 매일신문 자료사진
"나와 박 대통령의 '관계'는 사실 이상으로 증폭돼 왔다. 내 승진이 당시 사회에서는 수용되기 힘들 만큼 파격적이었던 데 견주어 나의 '배경'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짚이는 것이 없자 그 이유를 대통령에게 떠넘기지 않았나 싶다. 대통령이 밀어 준다고 떠벌린다 해서 누가 확인하려 들 것인가. 내 이미지가 박 대통령과 닮았다는 사실도 그와 나에 대한 소문을 만드는 데 한몫 했다. 실제로 20대 초반, 나의 별명은 '리틀 박'이었다. 친구들이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나는 "내가 더 큰 데 왜 내가 리틀박이냐?"고 웃어넘겼다. 인상이 그러한 데다가 일을 많이 한다는 공통점이 가세해 내 뒤에 박 대통령이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감옥에 들어가게 하고, 사회 진출을 막았던 장본인. 그 장본인이 밀어줘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는 오해를 받고 있던 내가 박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가 10.26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인 10월20일 경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의 자전적 에세이 '신화는 없다'(1995년 김영사 출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회상하는 대목이다. 이 대통령 스스로 인정하듯 그와 박 대통령의 공통점은 이처럼 세간에 자주 오른 내린다.
1917년 경북 선산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박 대통령과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목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 대통령은 태생적 환경부터 엇비슷하다. 두 대통령 모두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평범하지 않은 두뇌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자수성가를 이룩한 대표적 인물이다.

두 대통령의 공통점이 새삼 거론된 건 지난 대선 때였다. 박 대통령의 구미 생가를 방문한 이 대통령은 방명록에 '한강의 기적에 이어 낙동강·영산강 기적을 이루겠습니다'라고 적었다. 한반도대운하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글이었다. 이 후보는 박 대통령 사진 옆에 얼굴을 대면서 "내 얼굴하고 닮았죠"라며 웃어보이기도 했다. 서울시장 시절 선글라스를 끼고 출국한 유럽 순회 방문 때도 박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외모가 화제가 됐다.
사실 이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악연으로 얽혀져 있다. 학생운동(6.3 시위) 전력으로 중앙정보부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이 대통령이 박 대통령을 수신인으로 한 편지를 청와대에 보내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신화는 없다'에서 이 대통령은 "내 전력을 솔직히 밝히고,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충정을 토로한 뒤, 사회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높게 비판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라는 이 시대 화두가 두 대통령의 공통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구미 박정희체육관에서 열린 결의대회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나보니 그야말로 가난한 나라를 먹고살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지금의 우리 국민 또한 박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한 새마을운동, 포항제철 및 중화학공업 육성 등을 통해 오늘날 경제성장을 견인했듯 현대건설 신화에 이어 서울 청계천 복원과 버스노선 개편을 일궈낸 이 대통령이 다시 한번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어 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상준기자 all4you@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안티-최상천 전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알몸 박정희’(인물과사상사 펴냄)의 저자 최상천(57) 전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오래 전부터‘박통주의’와 대결해왔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는 박정희를 두고‘악마적 이기주의자’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충성도와 지지율이 전국 최고인 지역에서 이런 발언이라니, 용기가 있거나 무모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충분하다고 했다. 오히려 지면이 모자라지 않겠냐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책에서 박정희 신화에 가려진‘알몸’을 속속들이 들춰냈다. 일제에게 충성 혈서를 쓰는 다카키 마사오에서 일본군 장교로, 남조선노동당 군 최고 책임자인 공산주의자로, 다시 반공주의자로, 육군 정보장교로 끊임없이 얼굴을 바꿔온 그를 두고 최씨는‘악마적 이기주의자’라고 칭했다.“자신의 이익을 위해 민족·동지·조국을 팔아먹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죠. 이런 박정희식 이익추구 방식이 사회 곳곳으로 스며들면서 지금과 같은 사회가 된 겁니다. 공동체적 기반은 사라지고 오로지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풍토 말입니다.”경제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폭력적이고 비윤리적 방법을 합리화한 박정희를 이기주의의 화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왜, 사후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대한민국은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실제 대선 당시 이명박·박근혜는 박정희의 정치적 후계자임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최 교수는‘경제’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서민들은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것을 해결해줄 대안세력이 없으니 더욱 힘들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정치적 메시아의 이미지가 된 박정희를 찾게 되는 겁니다.”'리틀 박정희'를 자처하는 이명박·박근혜를 지지함으로써 미래에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게 된다는 것.“독재체제에 오래 살면 생각하는 능력이 사라집니다. 신호에 따라 움직이죠. 아직까지‘박정희’라는 하나의 거대한 상징적 표상에 따라 우리 사회가 움직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박정희를 존경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허구에 가깝다. 실제로 박정희 기념관 추진 당시 민간 부문 모금액이 기대치인 500억원에 훨씬 못미치는 100억원에 그쳤다는 점은 그것을 반증한다.
모두들 말한다. "박정희가 보릿고개를 넘게 해주지 않았냐"고. 이것은 지금까지 이어온 박정희주의를 압축하는 말이다. 최 교수는‘과연 모두를 위한 경제발전이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박정희 시대의 경제 핵심은 인플레예요. 18년동안 땅값이 연평균 33% 올랐었죠. 정경유착 등 구조적 부패의 출발점이기도 해요. 과연 서민들을 위한 경제였습니까? 재벌만 양산해내는 시대 아니었습니까? 그 덕에 우리는 IMF라는 쓴맛을 봐야 했고요.”
이번 총선 결과를 두고 최 교수는 "국민은 자신들이 속한 계층적 이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눈을 찌른 격"이라고 단언한다.“현재 정권이 추구하는 것은 상위 10%만을 위한 나라입니다. 아예 부자가 가는 길과 가난한 사람이 가는 길을 따로 만들고 있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의료보험의 민영화와 자율형사립고 확대, 영어몰입교육입니다. 중학교 졸업하면서 귀족층과 평민층으로 갈리는거죠. 결국 우리가 찍은 표가 하위 90%인 우리에게 비수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겁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북한은 김일성의 아들 김정일이, 남한은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이끌어가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고 최 교수는 우려한다. 독재자의 아들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대로 가다가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를 넘어서는 것이 희망적인 미래로 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 벌고 출세하려는 박정희 주의를 넘어서서 공동체적 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지금의 박정희 열풍은 국민들의 자기 신세타령이나 다름없습니다. 삶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까요. 우리 사회가 건전해지면 박정희 대통령도 재조명될 겁니다. 우리 사회에 희망을 가져다줄 창조적 소수가 필요한데, 글쎄요. 공동체적 조건이 무너진 상황에서 모두 너무 지쳐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요.”
사진 정재호기자 newj@msnet.co.kr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

 

[박정희]영남대 '교주'
영남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무관치 않다. 학교법인 영남학원(영남대학교와 영남이공대) 정관 제1장 총칙 제1조(목적)에 ‘영남학원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즉 학교 주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1947년 설립된 대구대와 50년 세워진 청구대를 통합, 영남학원과 영남대를 발족시킨 것은 67년 12월이다. 영남학원 설립 배경에 대해 ‘영남대 50년사(1996년 12월 발행)’는 설립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과 배려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들을 명확히 하고 있다.

50년사에 나타난 내용을 간략해 보면…, 두 대학 통합으로 영남대를 설립함으로써 새로운 재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박 대통령을 교주로 한 영남학원은 이후 양적`질적으로 크게 성장했고 최고 통치권자를 교주로 두고도 민립대학으로서의 전통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다.

이는 영남대 구성원들의 단결된 힘과 애국정신에 입각한 국적 있는 교육을 강조했던 교주 박정희 대통령의 교육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통합과 설립 초기에 가졌던 교주의 본교에 대한 관심과 교육에 대한 열정은 장기집권과 더불어 점차 퇴색`왜곡돼 갔다.

특히 10월 유신 이후 박 대통령은 오직 권력 유지에만 집착할 뿐 영남대에 대한 애초의 꿈과 포부는 망각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대통령은 명목상의 교주로서 존재할 뿐이었다. 더욱이 대통령의 비극적인 최후는 영남대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말았다.

이후 영남대 재단은 박정희의 가족들에게 계승·운영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정과 비리를 양산하고, 결국 교수협의회와 학생, 동문들을 중심으로 재단 퇴진운동을 전개했고 재단 퇴진운동은 마침내 재단 개편과 총장 직선제 관철 등 학원 민주화를 이루게 됐다. 이렇듯 영남대는 온갖 고난과 고통의 연속 속에서도 민립대학으로서의 전통을 지켜왔으며, 그것이 바로 영남대의 전통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영남대는 지금 교주(박정희)가 아닌 교육부가 임명한 관선이사들로 인해 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이처럼 주인이 학교를 버려둔 세월(임시재단 체제)이 벌써 20년째 접어들고 있다. 그동안 임시이사가 15차례나 선임되고 직선 총장 5명이 탄생했지만 학교의 발전상은 눈에 띄는 게 없는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교육부는 올 4월부로 영남대 재단을 임시이사 파견 사유 소멸 대학으로 판정, 6월말까지 법인 정상화가 완료돼야하는 대학으로 분류했다. 이에 따라 영남대는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노석균 영남대 교수회 의장)를 구성, 정상화 추진을 위한 홍보활동에 돌입한 가운데 다음 주부터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의견수렴을 위한 설문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교수·직원·학생 대표와 동창회·총장·법인 추천인 등 13명으로 구성한 추진위는 재단 정상화를 위한 홍보물을 통해 임시이사 선임 이후 ▷재단으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이 거의 없었고 ▷재단의 중요 수익사업이었던 영남종합금융을 잃었으며 ▷입학생의 수준, 졸업생의 사회진출, 교육·연구 등 대학의 수준과 연결된 각종 지표에서 전반적으로 위상이 추락되고 ▷영남의료원의 경영수지 악화 및 시설 재투자가 미흡했고 ▷새 총장이 들어설 때마다 대학경영의 기본이 변하는 등 일관성을 잃고 ▷총장 직선으로 인해 대학과 구성원들의 에너지가 분산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제는 정상화 돼야 한다”는 주장도 빠뜨리지 않았다. 재단 정상화에 대한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을 경우 ‘사학분쟁조정위원회’직권으로 정식이사를 선임하거나 재단 정상화를 이루지 못한 이유로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대학 발전을 위한 기여도 없고, 확실한 비전도 없는 주체에 의해 위탁경영 받는 일이 이어날)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노석균 위원장은 “재단 정상화는 적법하고 정당하게 이뤄져야 한다”면서 “구성원 의견수렴 후 임시이사 체제 직전의 정식재단 측 등 이해관계인의 의견을 바탕으로 도출해낸 합당한 안으로 재단의 정상화가 이뤄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만큼 무엇보다도 구성원의 노력으로 정상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우동기 영남대 총장도 “권한과 책임을 가진 정식재단이 합법적인 과정과 절차를 거쳐 학교 경영을 맡아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영남대 한 교수는 “재단 정상화는 영남대의 생존을 위한 안정적이고 기본적인 틀을 갖추는 것으로, 구성원들의 동의를 거쳐 학교설립 이념을 잘 구현하고 학교발전을 이뤄낼 수 있는 쪽으로 정식이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한편 영남대는 현재 80여만평의 광활한 캠퍼스에 학부와 대학원을 합해 2만6천명의 재학생, 총 16만명의 졸업생을 두고 있다.

황재성기자 jsgold@msnet.co.kr
작성일: 2008년 0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