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2월 대선 이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래도 우리 국민들의 마지막 자존심과 도덕성을 믿었는데 결과가 너무 참담하게 나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해는 합니다. 서민들 대다수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자존심과 도덕성이 밥 먹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경쟁후보로 나온 이회창, 정동영, 문국현, 권영길, 이인제 등이 모두 분명한 한계를 보였기에 어쩔 수 없이 이명박을 찍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책임은 정치권과 언론의 몫입니다. 정치권은 후보에 대한 검증, 민생관련 공약, 국정운영 청사진 등 국민이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을 외면한 채 이미지 싸움과 네거티브로만 일관했습니다. 언론 또한 이같은 정치권을 비판하거나 질타하지 않고 무분별한 여론조사를 통해 더욱 부추겼습니다. 지금 민심이 분노하는 것은 이제야 사태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노명박'이라고 하면서 노무현과 이명박을 비교하지만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이 경박하기는 하지만 노무현은 그래도 진정성이 있습니다. "다른 건 다 깽판 쳐도 남북문제만 잘 풀면 된다"는 발언이야말로 그런 그의 성격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다른 것을 다 깽판친다"는 표현이 국가원수로서는 격에 맞지 않고, 남북문제 보다는 민생문제를 더 중요시하는 서민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서민들을 기만하거나 겉과 속이 다른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속된 말로 '또라이' 과라고 보면 됩니다.
이명박의 경우 경박한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 몰입교육', '한반도 대운하', '747공약' 등에 있어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도대체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처음부터 할 생각이 있어서 공약으로 내걸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노무현과 가장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한반도 대운하'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공약이 바로 '행정수도 이전'과 '부안 방폐장'입니다. 노무현의 경우 여론의 몰매를 맞으며 사실상 재보선 전패의 한 요인이 되었는데도 끝까지 밀어부쳤습니다.
'영어 몰입교육'과 '한반도 대운하'로 지지율이 급락하자 청와대와 한나라당 모두가 긴급 진화에 나섰지만 좀처럼 하락세가 수드러들지 않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한마디로 그들의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강재섭도 찍혔고, 이재오도 찍혔고, 이방호도 찍혔고, 김덕룡과 박희태는 물먹었지요.
'친박연대'의 돌풍이 거세지자 '복당 절대불가'라며 배수진을 쳤지만 그래도 민심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총선에서 참패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소속을 영입하여 과반수를 만들 사람들이라는 것을 유권자들이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재오와 이방호가 아무리 방방 떠도 박근혜의 "총선 끝나고도 지도부에 남을 수 있겠느냐? 그 자리가 천년만년 하는 자리냐?" 한마디에 유권자들의 판단은 이미 끝나버렸습니다. 강재섭은 홍사덕 깃발에 나가떨어졌고, 이재오와 이방호는 낙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뱉어내는 말을 과연 누가 곧이곧대로 믿겠습니까?
결국 지금까지의 정황을 놓고보면 이명박은 대권을 얻었지만 민심을 잃었고, 박근혜는 대권을 잃었지만 민심을 얻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정치평론가들이 말하듯이 '친박연대'라는 당명이 '블랙 코미디'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권자들이 이를 저급한 코미디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말만 정당이지 민정당이 전두환당 아니었나요? 민주당은 김영삼당이고, 평민당은 김대중당이고, 공화당은 김종필당이고, 국중당은 심대평당 맞지요?
한나라당이 이명박계, 박근혜계, 그리고 중립인사가 골고루 포진했더라면 정당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도부, 공심위에 이어 공천까지 모두 이명박계가 독식했다면 이명박당이 맞지 않습니까? 이같은 논리로 보자면 차라리 '친박연대'가 유권자들에게는 솔직하게 비쳐집니다. 내용은 이명박당이면서 겉으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또 한번의 대국민 기만극이기 때문입니다. 통합민주당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김대중계, 정동영계를 모조리 아웃시키고 노무현계가 사실상 당을 장악했습니다.
거기에 장식품으로 손학규와 박상천을 얹어가는 모양새입니다. 이거 역시 노무현당이 맞습니다.
적지않은 국민들이 노무현에게도 화가 나있고, 이명박에게도 화가 나있는데 이명박당과 노무현당으로 표를 몰아달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이처럼 기형적 구조가 여전히 정치권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친박연대가 거센 바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나라당 일부인사가 박근혜에 대해 '배신자' 혹은 '기회주의자'라고 몰아세우며 손가락질하는 모양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합니다. 박근혜의 요구는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내가 승복한 것으로 당내화합의 초석을 놓았으니 승자인 이명박이 최소한의 화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공천에서 탈락한 인사들 많아야 20명입니다. 총 245명의 지역구 공천자 중 박근혜계가 40명인 것과 60명인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어차피 나머지는 다 이명박계인데 180명과 160명의 차이가 그리도 큰 것입니까? 당을 와해시킬 만큼? 바로 여기에 영남과 수도권 민심이 분노하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신기합니다. 박근혜가 당대표로 있던 시절에도 강재섭, 이재오, 이방호, 정두언 등이 모두 한나라당에 포진해있었는데 그 때는 한나라당 내부에서 전혀 잡음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갑자기 미쳐버린 것일까요? 아니면 어디 화성이나 토성에 갔다가 지금 나타난 것일까요? 이재오가 '간신배'라는 사실을 요즘들어 사람들이 많이 깨닫고 있고, 강재섭, 이방호, 정두언이 '기회주의자'라는 것을 요즘에야 사람들이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당 대표가 중심을 제대로 잡아 욕심을 부리거나 사적인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나올 수 없도록 분위기를 잡아갔다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시스템이 2년 3개월 동안 훌륭하게 작동되어 7%였던 지지율이 50%가 되었는데, 지금의 한나라당은 불과 두 달만에 지지율이 60%에서 30%로 반토막났습니다. 이게 중요한 팩트입니다.
지금 친박연대로 민심이 이동하는 것은 결코 이들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반드시 살아돌아가서 박근혜를 당 대표로 만들겠다"는 주장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당이 노무현 정권 4년간 신뢰받고 안정적인 모습을 유지한 것이 저절로 된 것인 줄 알았는데 이제서야 그것이 박근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유권자들이 이미 알아차려버렸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시죠. 지금의 한나라당이 과거 4년과 비교해서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바뀐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딱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박근혜가 중심에 있고 없고의 차이 입니다. 그 차이 때문에 국정운영도 파행으로 치닫고, 한나라당도 붕괴 직전의 위기 상황에 내몰려 있습니다. 과연 이것을 수습할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박근혜 뿐입니다.
거기에 유권자들이 동조하고 있기 때문에 친박연대의 바람이 갈수록 거세지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박근혜가 이미 한나라당 당권을 접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쪽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구식이 친박 무소속연대에 합류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명박에게 줄 선 것을 후회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박희태와 김덕룡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안택수, 권오을, 맹형규는 또 어떻습니까? 이들이 박근혜에게 줄 서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명박, 이상득, 이재오, 이방호, 정두언은 권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을 도운 사람들을 가차없이 버렸습니다. 이에 반해 박근혜는 힘을 잃은 상황에서도 자신을 도운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누구를 지도자로 모시겠습니까? 그래서 사실상 게임은 끝입니다.
김영삼이 3당 합당 후에 대권후보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사람을 끝까지 챙긴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김윤환도 흔들렸고, 김중권도 흔들렸고, 박희태도 흔들렸고, 이상득도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범민주계'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번 총선이 끝나고 나면 한나라당 사방에서 '신박근혜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박근혜는 이에 대한 '이삭 줍기'만 하더라도 순식간에 70~80명의 계보를 거느린 당내 최대 오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못 얻으면 그 순간에 강재섭, 이재오, 이방호의 정치생명은 끝납니다. 혹 과반수를 얻더라도 그것
이 160명 내외여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총 160명 중 박근혜계가 20여명이라면 과반수를 못 얻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강재섭은 불출마로 원내에 진입 못하고, 이재오와 이방호는 낙선하면 끝이고 당선되어도 '접전'이면 영향력은 없어진 상황이 됩니다. 때마침 정몽준도 여기자 성희롱 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박근혜의 저주'라는 항간의 표현이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토록 경쟁자들이 모두 자멸한 상황에서 박근혜만 독야청청 자신의 원칙, 소신, 이미지, 신뢰, 대중성을 모두 지키고 있으니 총선 결과에 관계없이 최대의 승자는 박근혜 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명박은 대권은 얻었지만 민심을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레임덕'이 불가피합니다. 아마도 노무현,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가 겪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한 현실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해 박근혜는 대권은 못 얻었지만 민심을 얻었습니다. 이제서야 유권자들이 박근혜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 민심의 현주소를 확인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4월 9일은 '박근혜의 압승'으로 역사에 기록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