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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인간미

동 아 2008. 4. 2. 11:43

할머니 아무것도 안드셨다....!

  김 용삼 (월간조선 기자 )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의 제단에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
어느 시대나 그 시대상황에 맞는 상징어가 있게 마련이다. 김영삼 대통령의 시대가 「개혁 과 과거청산」으로 집약된다면, 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화두는 누가 뭐래도 「중화학공업 입국과 안보」였다. 
1970년대 대한민국의 국가 목표는 중화학 공업 육성과 석유위기 극복, 새마을 운동과 중동 진출, 자주국방이었다. 한 손엔 망치를 들고, 한손엔 총을 들고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세계사의 한 복판으로 뛰쳐나간 한국인들의 70년대. 그 질풍노도의 서막은 1972년 10월26일 궁정동의 총소리로 역사 속에 파묻혔다. 지금까지 두고두고 민주주의의 장례식이었다고 비판받는 1972년의 「10·17 특별선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 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 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대 통령으로서 부여된 역사적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정상적 방법이 아닌 비상조치로써 남북대 화 전개와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 실정에 가장 알맞는 체제 개혁을 단행 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나섰다. 체제 개혁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로 집약된다. 

『1.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 활동의 중지 등 현행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을 정지시킨다. 
2. 일부 효력이 정지된 헌법 조항의 기능은 비상 국무 회의에 의해 수행되며, 비상 국무 회 의의 기능은 현행 헌법의 국무 회의가 수행한다. 
3. 비상 국무 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며, 이를 공고한 날부터 1개월 이내에 국민 투표에 부쳐 확정시킨다. 
4. 헌법 개정안이 확정되면 개정된 헌법 절차에 따라 늦어도 금년 연말 이전에 헌정 질서 를 정상화시킨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 해산과 헌법의 일부 조항 효력 정지 등 초강경수단을 동원해 가면서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는 국민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는 자유 민주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능력이 없을 때에는 민주체제처럼 취약한 체제도 없다고….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 개정안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 다는 국민의 의사 표시로 받아들이고 조국 통일에 대한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것임을 아울 러 밝혀 둔다…』
지금 와서 되새김질해 보면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발언이다. 박정희는 자신의 결단을 민 족의 유구한 장래와 연관시켜 냉엄하게 비판해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특별선언의 말미 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국민 여러분 나는 이번 비상조치의 불가피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오늘의 성급한 시 비나 비방보다는 오히려 민족의 유구한 장래를 염두에 두고 내일의 냉엄한 비판을 바라는 바입니다. 나 개인은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의 제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 다…』
유신선포와 거듭된 긴급조치로 인해 사회는 경직되었고 민주주의는 시들어 갔다. 그러나 조국 근대화와 자주국방이라는 70년대의 벅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박정희는 인권과 삼권 분립, 부의 공정한 분배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상당 부분을 희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 다. 
철권의 통치자 박정희는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자신의 암살자와 맞선 상 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천지를 뒤흔든 문세광의 저격 장면은 이렇게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온다. 박대통령의 연설은 정확히 10시10분20초에 시작 됐다. 다음은 연 설이 시작된 지 15분 정도가 지난 10시 25분 24초의 정황이다. 
 

74년 광복절 기념식장의 비극

8.15 광복절 사고현장 녹음자료 2.0Mb 

『나는 오늘 이 뜻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이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둔탁한 첫 번째 총성. 이 총성은 문세광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다가 오발하 여 자신의 왼쪽 허벅지를 쏜 소리였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 동안 시종…』 
(와아 하는 함성) 
『땅, 땅, 땅땅』 
(총성과 사람들의 함성이 뒤섞인다. 이 총성은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해 발사한 것 인데 제2탄은 박대통령을 가리고 있던 방탄 연설대 좌측 상단에 맞았고, 3탄은 불발, 제4탄 은 육영수 여사의 오른쪽 머리를 명중시켜 목숨을 앗아갔다) 
경호원 : 『가만히 계세요. 그냥계세요. 가만히 계세요』 
박정희 : 『무엇 때문에 그냥 뒀어』 
경호원 : 『잡았나?』 
경호원 : 『예, 잡았습니다.』 
경호원 : 『사모님은』 
『땅』(마지막의 이 총성은 경호원이 발사한 것으로, 광복절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합창단으 로 참석했던 성동여실고 장봉화양의 생명을 앗아갔다) 
경호원 : 『사모님은』 
박정희 : 『병원에 옮겨. 빨리. 병원에 빨리 병원에』 
경호원 : 『가만 있어봐』 
박정희 : 『빨리 병원에 빨리 옮겨』 
경호원 : 『또 딴 사람』 
사회자 : 『일반 시민 앉아주세요』 
경호원 : 『뒤로 좀 모셔야 되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 소리가 한동안 계속된다. 연단 아래로 엎드렸던 박 대통령이 일어서자 관객들이 환호하는 소리였다. 10시26분, 약 10여 초 간 말없이 연설문을 바라보던 박대통령은 중단했던 기념사 부분을 정확히 찾아내 연설을 이어갔다. 
그 순간 단상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회의장, 민복기 대법원장, 김정렴 비서실장 등은 애간 장이 녹았다고 한다. 통상 암살의 경우 1선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2선, 3선을 준비하게 마 련이다. 언제 어디서 또 다시 암살자들의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 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연설을 이어간 것이다.(이석제 당시 감사원장의 증언). 

박정희 : 『여러분들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원하는 평화통 일의 기본 원칙을 명백히 천명하고자 합니다.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기본 원칙은 첫째는 우선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남북은 상호 불가침 협 정을 체결해야 합니다. 둘째는 남북은 상호 문호를 개방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하며 이를 위 해서 남북대화를 성실히 진행시켜야 하며, 다각적인 교류와 협력이 먼저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연설이 끝난 것은 오전, 10시33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박대통령은 아래 떨어진 육여사의 핸드백과 고무신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자 서울 시장이 이것을 주워 경호원에게 전해주었다. 

아내 잃은 허전함…

박정희는 강인한 내면을 가진 인간이었다. 패기만만했던 일본 육사 시절부터 사선을 넘나들 었던 남로당 관련사건, 6·25의 숱한 전쟁터, 국가의 운명을 건 5·16의 대도박…. 
시대의 태풍을 맨 몸으로 맞으며 그는 역사의 숲을 헤쳐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철권의 권력자라도 60대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아내를 잃음으로써 내면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8·15 광복절 단상에서 남편 대신 목숨을 잃은 육영수 여사의 서거 장면은 라디오와 텔레 비전으로 전 국민의 안방에 생중계됐다. 그만큼 국민의 마음 깊숙한 곳에 육영수라는 한 인 간의 드라마틱한 영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박정희는 외면으로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내면으로는 조금씩 기울어 가며 인생의 황혼기에 느끼는 허탈감을 체험해야만 했 다. 

 청와대 본관의 1층 집무실에서 격무에 시달리다 2층으로 퇴근하면 썰렁한 빈방에서 긴긴 밤을 홀로 뒤척여야 하는 홀아비 시절, 박정희는 아내를 잃은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일기장 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제는 슬퍼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문득 떠오르는 당신의 영상/ 그 우아 한 모습/ 그 다정한 목소리/ 그 온화한 미소/ 백목련처럼 청아한 기품/ 이제는 잊어버리려 다짐했건만/ 잊어버리려 하면 더욱 더/ 잊혀지지 않는 당신의 모습…」(1974년 9월4일) 

 아내를 잃은 지 2년이 지난 1976년 청와대에서는 큰 영애 박근혜씨의 생일 축하 파티가 열 렸다. 대통령이 엄마 잃은 큰딸의 생일을 위해 잔치상을 차린 것이다. 대통령과 근헤, 근영, 지만씨 등 네 피붙이만 모인 조촐한 생일 파티는 박대통령에 의해 녹음되었다. 
월간조선이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이 녹음테이프는 어딘가 좀 쓸쓸하면서도 적막했던 청와대 생활의 단면을 전하는 듯 애잔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육영수의 빈자리가 그 만큼 넓었다는 뜻이리라. 

『가산 탕진하겠어요. 아버지』

박근혜 생일축하 파티 6.0Mb 

박정희 : 『빨리 와야지. 모두 동작이 그렇게 느려서』 
근혜 : 『어머 저쪽에 지만이가 누가 보낸 거라고 가지고 왔는데』 
박정희 : 『가져와. 그게 뭐가. 케이크가? 케이크는 그 쪽에다 놔』 
근혜 : 『아버지 너무 요란하게 하셨네』 
박정희 : 『덕택에, 덕택에 아버지도 좀 얻어먹어야지』 
(샴페인 터지는 소리) 
박정희 : 『막아야지…. 지금부터 사진 찍어도 돼』 
근헤 : 『말도 제대로 못하겠네』 
박정희 : 『함부로 해 함부로. 지만이 거기 앉고. 근영이 왜 안와. 이야기 했어. 이야기 했 는데 꾸물꾸물하고 앉았어』 
근혜 : 『테이블보가 이런 걸로 하니까 굉장히 화려해 보이죠』 
박정희 : 『게 앉거라』 
근혜 : 『이거를요, 옜날부터 있던 거예요. 어머니 계실 때부터 이 촛대가, 근데 언제 쓰나 하고 찬장에 두었거든요. 근데 오늘 문을 여니까 마침 보여서 이런 때나 쓰자 하고 네, 없는 거보다 훨씬 낫지. 니(근영)생일 때 또 가져다 쓰고, 아버지 생신 때도 가져다 쓰고』 
박정희 : 『찬장, 그 2층 식당 찬장 그 어디 두면 뭐 할 때 쓸 수 있겠지. (근영씨를 향해 서) 빨리 와 
(근혜씨 쓸쓸한 웃음) 동작이 이래 느려서. 사진 찍고 녹음하고 있는데』 
근혜 : 『아버지, 너무 거창하게 하셨어요』 
박정희 : 『뭐 거창하게 해』 
근혜 : 『아버지 생신 때도 이렇게 안 하시고서는 뭐』 
근영 : 『언니…』 
박정희 : 『자 샴페인 이쪽으로 받아. 자 근영이, 지만이 생일 때도』(샴페인을 따른다) 
근혜 : 『가산 탕진하겠어요, 아버지. 이런 식으로 생일 하다가는』 
박정희 : 자… 아버지한테 따라…. 자 근혜』 
근혜 :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박정희 : 『그쪽 먼저 해야 되나? 그럼 그쪽 거 먼저 하자』 
근혜 : 『아니 쪼그만 거 아버지가 이렇게 해오셨어 글세』 
근영 : 『아 맛있겠다』 
근혜 : 『잔을』 
박정희 : 『자 축배 한 잔 들고. 하나 둘 셋 생일 축하해』 
근영 : 『언니, 생일 축하해』 
근혜 : 『감사합니다. 고마워. 아버지 녹음하는 건 중단하죠. 제가 말을 못하겠어요. 주눅이 들어서』 
박정희 : 『그래야 사진을 찍지 뭐. 요거만 찍으면 몇 번 안나오대』 
근혜 : 『녹음』 
지만 : 『이스라엘 건데』 
박정희 : 『지금 녹음 같이 돌고 있는 거라고』 
근혜 : 『글세, 그러니까 제가 말을 못하겠다고』 
근영 : 『괜찮어 어때』 
박정희 : 『근혜야 동작 늦어서 마지막에 퉁퉁하고 오는 것까지도 다 들어갔어』 
근혜 : 『세상에 어쩜. 아버지 이거 가만있어, 밥 먹기 전에 하면 안되잖아』 
박정희 : 『거기다 놓고 하나만』 
근혜 : 『아버지 이건 정말 너무하셨어요』 
박정희 : 『비밀녹음했다. 비밀녹음』 
근혜 : 『나중에 자기가 한 거 들어봐 얼마나 쑥스러운지』 
근영 : 『괜찮어』 
근혜 : 『아유 이거 공보부 사람이 다 들을 거 아녜요. 쑥스러워서』 
박정희 : 『어때 이제 그만 하지』 
근혜 : 『잘 넘어가지가 않아요』 
박정희 : 『옆에 방에 뭐 포도주 좀 준비했더라구. 장군, 지금 준비하고 있나?』 
장군 : 『예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정희 : 『근혜야 잔 받아』 
근혜 : 『됐어요. 저는 많이 못먹어요』 
박정희 : 『저 사람들 줄라고 그래』 
근혜 :『됐어요. 더 이상 못먹어요』
박정희 : 『장군』 
장군 : 『예』
박정희 : 『자네들 가져가서 한잔 씩들. 그리고 이런 거 이런 거 뭐 좀 취사장에서 가져오 라고 해. 자 수고들 했네』 
근혜 : 『고마워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과년한 딸을 위해 생일상을 차려준 아버지의 가슴속엔 어떤 감정들 이 교차했을까. 촉촉이 젖어드는 듯한 분위기의 이날 생일잔치는 나약해져가는 인간 박정희 의 한 단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 같은 애잔한 장면이다. 
지금까지 우리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이 파안대소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 만큼 인간 박정희는 과묵하고 근엄한 철권의 통치자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 가 실은 부끄럼 잘 타는 사람이었고, 우스개도 곧잘 했다는 사실을 측근들의 증언으로써만 남아 있다. 

월간조선이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박정희 대통령의 장모 이경령여사(육영수 여사의 어머니)의 생일날 마련됐던 청와대 가족모임의 녹음 테이프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박정희의 모습을 적나 라하게 보여주는 귀한 자료다. 
정부기록보존소측 기록에 의하면 이 가족모임은 75년 하반기에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이 가족모임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이여사의 생일이 1896년 음력 12월11일로 기억했다. 양력으로 환산한 다면 75년 1월 22일. 장소는 청와대 본관 1층 식당. 정면엔 육여사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조촐 한 음식이 준비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익명을 요구한 가족모임 참석자의 증언. 
『이날 모임은 74년 8월 15일 육여사가 비명에 간 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열렸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딸을 잃은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사위인 박대통령이 무진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딸 잃은 장모 위로 위해 노래자랑

홀아비가 된 사위가 팔순의 장모를 위로하기 위해 연 생일 축하연. 장모 이여사는 사랑하는 딸을 잃 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박정희 대 통령은 평소보다 명랑한 표정을 지었고, 농담도 숱하게 했다고 한다. 이여사는 시종 즐거운 얼굴을 지 었지만 마음 속에 담긴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내보이지 않기위해 무서운 절제력을 발휘했다. 
참석인사는 박대통령과 그 가족인 근혜, 근영, 지만씨. 그리고 육여사의 오빠인 육인수 의원 내외와 그 딸인 육해화씨와 그의 남편 이석훈씨(현 일석산업 사장), 남자 형제 육동렬 ,육동건씨. 육영수 여사 의 동생 육예수씨와 남편 조태호씨(당시 MBC감사).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처조카 가족들이 참석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육영수 여사의 언니인 육인순씨는 홍정일씨와 결혼해 모두 3남5녀를 두었다. 
홍세표씨(현 한미은행장)와 그의 부인 김영자씨. 홍은표씨(현 수원대 생활과학대학장)와 그의 남편 장덕진 현 대륙연구소 회장. 홍정자씨와 그의 남편 유연상씨(전 영남대 이사장). 홍지자씨와 그의 남편 정영삼 현 민속촌회장. 
홍청자씨와 그의 남편 윤석민 전 서주우유 회장. 그리고 홍국표씨(현 어린이 교통안전협회 사무총장) 와 홍민표씨 (현 현대자동차서비스 이사)등이었다. 
이날 가족모임은 장모인 이여사의 생일이었던 만큼 처가쪽 사람들을 초청해 즐거운 시간을 마련한 것이다. 이날 가족모임이 누구의 제안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녹음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 테이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파안대소하는 소리, 간간이 정치적 의미가 섞인 농담, 일가친족들의 개성이 섞인 노래자랑…. 그 말미엔 가족 모두가 존경하던 육여사를 잃은 가족들의 애잔한 분위기로 인해 콧날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그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한다. 

『지명받고 안하면 빼갈 한 꼽뿌씩』

(음식 먹는 소리) 
박정희 : 『술 있나. 개운하지 화끈한게, 술 좀 드세요.(웃음) 누가 아께 노래한다더니 어떻게 됐나. 누구 사회 할 만한 사람 없나. 노래 잘하는 거와 사회 잘하는 거와 다르다구』 
홍국표(박 대통령의 처조카) : 『아 할머니가 지적하셔야지. 지적하시면 되겠네』 
(코 푸는 소리) 
박정희 ; 『사회하는 사람이 저부터 먼저 하고…』 
홍국표 : 『제가 사회를 보기 전에 먼저 노래를 하고 그 다음에 사회를 보겠습니다. 배가 고파서 사 실 노래를 잘하는데, 아랫배가 나와야 노래를 원래 잘하게 되어 있는데, 아랫배가 나오지 않아서…』 

(홍국표씨가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노래를 한다. 이 노래는 박대통령의 애창곡이기도 했는 데, 박대통령은 이 노래 외에도 「황성옛터」 「짝사랑」등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육인수 : 『대표로 이 자리에 대표로 KBS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박정희 : 『그만 하면 사회 자격이 있어』 
조태호 : 『하고 싶은 옛날 노래로』 
박정희 : 『할머니 (장모 )좋아하시는 거 해. 너그 요즘에 하는 미치괭이 같은 거 하지 말고 말이 야』 
홍국표 : 『앵콜입니다. 앵콜을 원하시는 분 박수 한 번. 반대하는 사람없지. 이것은 과반수 이상이 니까』 
(홍국표씨가 「목포의 눈물」을 부른다) 
홍국표 : 『다음은 누구를 시킬까요』 
박정희 : 『누구시킬까가 아니라 사회자가 봐서 이래…』 
장덕진 : 『영도력을 발휘해서 자』(장덕진씨는 대통령의 처조카인 홍은표씨 남편으로서 당시 농수산 부 차관이었다) 
홍국표 : 『원래 사실 제 실력은 우리 집에서 끝에서 두쨉니다. 원래 잘하는 사람이 한 분 계십니다. 저 장차관(장덕진씨를 말함), (너털웃음) 저희 큰 매형입니다.(박수소리)』 
(코 푸는 소리) 
장덕진 : 『지명받고 하지 않으면 또 이상하고…』 

박대통령은 축농증의 일종인 부비동염을 앓은 적이 있다. 1960년대에 대통령은 코 수술을 받았으나 재 발했고, 1978년에 다시 수술하여 완치했다. 
박정희 : 『지명받고 안하면 저 빼갈한 꼽뿌씩』 
장덕진 ; 『아이구 각하 혹시 제가 해서 괜찮으시면 아까 말씀드린 KBS에 전속 가수라도 좀』 
(구름도 울고넘는 울고넘는 저 산아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는 장덕진씨의 애창곡이다) 
장덕진 : 『각하 그 선거이야기 마침 나왔는데 봉천동 그쪽 가가지고요. 밤에 한 20∼30명 모였는데, 특히 부인들이 많이 나오는데 술을 한 잔 주고서 노래 한 마디 한 다음에 도와달라고 하면 되게 박수 치면 표는 나오는거 같은데』 
(장덕진씨는 1971년 국회의원 총선 당시 서울 영등포 갑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 시절 서울에서 공화당 후보들이 거의 다 낙선했는데 장덕진씨는 공화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도전하여 당선한 것이다) 
박정희 : 『자네 아주 목청이 좋아. 그만하면 아주. KBS 나가면 뭐라고 그러더라』 
육인수 : 『도중에서 땡땡은 안 당하죠』 
(웃음) 
박정희 : 『목청이 아무리 좋아도 박자가 안 맞으면 중간에서 땡이야』 
육인수 : 『…음악관계는 아주 영, 나제일 듣기 싫은 게 요즘 음악이라 그것 좀 어떻게 민방에다 넘 기고 다른 거 하라고 』(당시 육인수씨는 국회의원으로서 문공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홍국표 : 『이번에는 노래를 또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웃음) 사회자를 무 시하는데 사회자 신임을 한번 묻겠습니다』 

『긴급조치 발동해』

박정희 : 『(웃으면서) 국민투표 해(너털웃음) 국민투표』 
홍국표 : 『사회자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여기서 퇴장을 선언하고, 신임을 물어서 신임에 찬성이 나오면 사회자는 여기서 절대입니다』 
박정희 : 『신임 물었으니 긴급조치 발동해. (웃음) 야 큼직하니 하나 해봐. 지만이. 박수 칠게 (박 수)』 

이 시절은 74년 1월부터 긴급조치가 발동되기 시작했고 유신헌법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는 상황이었 다. 김지하 시인은 긴급조치가 발동되자 「1974년 1월을 우리는 죽음이라 부르자」는 시를 발표하는 등 민주화 세력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유신헌법에 대한 거센 도전에 직면한 박대통령은 75년 1월22일, 특별 담화를 통해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 실시를 선언했다. 그는 이 국민투표의 의미에 대해 『유신헙법에 대한 찬반 투표는 물 론,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신임투표로 간주하겠다』면서 찬성이 과반수가 넘지 않으면 즉각 대통령직 에서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2월12일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국민들은 찬성 73.1%로 박정희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 날 가족모임에서 박대통령은 분위기를 즐겁게 하기 위해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 「긴급조치 발동」등 정치적 패러디를 사용한 것이다. 

박지만 :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모두 웃음) 잘 안되네』 
박정희 : 『지만이 틀려도 괜찮아. 해. 얼떠서 그래』 
박지만 :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 밝았네(새아침이 밝았네를 틀리게 노래했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합창으로 노래를 한다) 살기 좋은 새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박수소리) 
홍국표 : 『저는 국민투표에 부쳐서 신임을 얻은 바 있습니다. 이제부터 사회자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퇴장이 아니라 어떻게 할까요. 이 안에서 노래 부르라고 할까요. 다음에는 근영양의 차 례가 된 것 같으니까 요번에는 도망을 못갑니다』 
(박근영씨가 「비둘기 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노래를 부른다) 
홍세표 : 『옛날에 각하하고 이모(육영수 여사)하고 결혼식 때하구 약혼식 때 각하께서 부르시던 노 래가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박정희 : 『결혼할 때 뭐 대구에서 했는데 너는 서울에서 있었는데 무슨』 
홍세표 : 『결혼식에 제가 있었죠』 
박정희 : 『있었나?』 

「새마을 노래」와「나의 조국」손수 작사 작곡

박대통령과 육여사는 1950년 8월 피란지 대구의 조그만 식당에서 약혼식을 올렸고, 그해 12월 12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결혼을 반대했던 신부의 아버지 육종관씨는 결혼식 에 참석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지 못한 쓸쓸한 결혼이었던 것이다. 
홍세표 : 『검푸른 숲속에서 맺은 꿈은 어여쁜 꽃밭에서 맺은 꿈은 이 가슴을 설레어라 첫사랑의 노래랍니다. 그대가 있었기에 그대가 있었기에 나는 그대 것이 되었답니다. 그대는 나의 것이 되었답 니다』 
이 노래는 홍세표씨(현 한미은행장)가 박대통령에게 배운 노래라고 하는데, 대구에서 결혼식 때 박대 통령은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이날 행사 참석자는 전했다. 박 대통령은 노래를 잘 부르는 편은 아니 었지만 풍금을 잘 탔고 퉁소를 잘 불었으며, 박자와 음정이 정확했다고 한다. 
「새마을 노래」와 「나의 조국」을 박대통령이 작사 작곡했을 때 세간에는 작곡을 전공하는 근영씨 가 도와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 노래는 박대통령이 몇날 며칠을 열심히 고민해가며 지은 것이라고 한다. 다음은 박대통령의 처조카인 홍국표씨의 증언. 
『근영씨에게 나의 조국과 새마을 노래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박근영씨는 전혀 도와 준 것이 없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아보니 박대통령이 몇날 밤을 끙끙 앓아가면서 직접 오선지에 곡 조와 가사를 그려 완성한 노래였어요』 

육여사 추모의 노래

박정희 : 『그건 옛날 듣던 노래가 아니야. 누가 했냐면 경북 교육감 하고 있는 이성조란 사람이야. 그 사람한테 배웠을 때』 
홍국표 : 『사회자가 배가 고파서 잠깐 (웃음)』 
박정희 : 『사회자는 희생하는 거지. 굶고 하는 거지 뭐』 
홍국표 :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몇끼라도 굶을 수 있습니다』 
박정희 : 『그게 명 사회자야. 굶고 하는거』 
-사이- 
박정희 : 『앵콜』 
홍정자 : 『할머니 좋아하는 그 노래가 너무』 
박정희 : 『할머니 좋아하는 거』 
홍정자 : 『제 음성으로는 뽑을 수가 없어요. 저기 아저씨 좋아하는 거 황성옛터예요.(노래를 부른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중단·웃음)』 
박정희 : 『됐어. 정자 목소리가 아주 깨끗하고 좋은데, 시작을 그렇기 때문에 반주가 필요하다고. 어 데서부터 시작할지 이렇게 하면 밑에가 안나오고 여서 하면 위가 안나오고』 
홍정자 :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울면서 노래)애쓰는 마음…. 목소리 난 다음에 할게요』 
박정희 : 『그래 잘했어(박수). (육동렬씨에게) 키가 형제지간에 제일 큰거 같애』 
(육동렬씨가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노래를 한다. 노래도중 높이 올라가는 부분에서 목소리가 올라가지 않아 일동 폭소) 
육인수 : 『이자식아 돌아다니면서 저 아버지, 괜히 뭐냐 망신은 다 시키고 다니고』 
(이날 가족 모임 참석자들은 돌아가며 한 곡씩을 불렀는데 유독 육인수 의원만은 노래를 사양했다 육의원은 노래에 관 해서는 조예가 깊지 않았기 때문이다) 
육동렬 : 『아버지가 잘못하셔서 그래요 
박정희 : 『육씨가 제일 떨어진다 노래. 동건이 한 번 시켜봐 
(육동건씨가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노래를 한다. 소리가 나오지 않아 높이 올라가 지 않아 높이 올라 가는 부분에서 고래고래 악을 쓴다) 
박정희 : 『동건이가 제일 멋있다. 안나오더래도 돼지 목따는 소리가지고 올려 가지고 
(다음은 박정희 대통령의 큰딸 박근혜씨의 선창으로 온 가족이 박정희 작사, 작곡의 새마을 노래를 합창하는 장면이다) 
박근혜 : 『새벽종이 울렸는데 (모두가 합창)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 기 좋은 새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여러분 협조에 감사합니다』 
박정희 : 『국표 너 이모(육영수 여사) 가 할머니한테 노래했다는 건 다른건 몰라도 다 거짓말이다. 너 이모 다른 건 다 해도 노래할 줄 모른다. 육씨라놔서』 
홍국표 : 『또 하고 싶은 분 많겠지만 다음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제가 할머니와…따 님 마지막으로, 아무도 공개되지 않은 노래입니다. 1절 2절이 있습니다. 조용히 들어 주십시오. 가사를 음미해 가면서 (노래를 한다). 

아득히 들려오는 당신의 숨소리가 너무도 다정합니다. 너무도 다정합니다. 수많은 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꽃이 되어 피어납니다. 그윽한 향기를 풍겨 줍니다. 아직도 눈에 선한 당신의 뒷모습이 너무도 다정합니다. 너무도 소박합니다. 분노와 곡성이 물결치는 가운데 우리들은 다짐합니다. 내일의 영광을 약속합니다』(박수) 

『할머니 아무 것도 안드셨다…』

홍국표씨는 이날 식당의 벽면에 걸린 육여사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육여사 추모 노래를 불렀다고 과 거의 기억을 회상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제가 돌아가신 이모님(육여사)을 생각하며 직접 지었고, 노래가락은 어느 음대 출신 인사가 붙여주었습니다. 노래가 완성된 후 보급을 하려고 애썼지만 혼자 힘으로는 잘 안되더군 요. 그래서 이날 가족 모임 자리에서 부르게 된 겁니다.』 

홍국표씨는 노랫말을 지을 때 「수많은 별」은 우리 국민을, 「꽃이 되어 피어납니다」는 육여사의 우아한 모습이 국민의 마음 속에서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분노와 곡성」은 육여사를 암살한 북한 공산집단을, 「내일의 영광」은 통일을 상징하는 의미로 고민해 가면서 가사를 완성했다고 한 다. 
박정희 :『사회, 오늘 사회도 잘했고 노래도 잘했고 사회 오늘 수고했어 (풀죽은 목소리로) 우리만 잘 먹었지 뭐, 할머니 아무 것도 안드셨다.』 

바로 이 대목에 이 날의 행사 분위기가 집약되어 있다. 박대통령은 딸을 잃고 상심해 있는 장모를 위 로하기 위해 「외기러기」란 노래를 부르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끝내 장모의 울적한 마음을 되바꿀 수는 없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있는 가족모임 녹음테이프에는 박대통령 노래 가 빠져 있음). 
분위기가 경직되자 박대통령의 처조카 사위 장덕진 씨가 화재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장덕진 : 『각하, 이번에 새마을 취로사업 때문에 차관들 각 지방에 가지 않았습니까. 충북에 다녀 왔는데요. 거참 군수들이 정말 잘 하더군요. 2∼3년 전에 군수가 하는 걸 생각하는 거와 비교하니까 중앙의 행정이 그렇게 일선에 침투될 수 없다 할 정도로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 하는 것을. 옥천에도 다녀왔는데 일곱개 군을 이틀동안 돌았는데, 다들 굉장히 열심히 하려고 그러고 사명의식이 있는 것 같다해서 군수들이 잘한다는 거, 다른 차관들도 갔다 와서 군수들이 종합행정을』 
박정희 : 『요즘 우리나라 행정이 야당이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뭐라뭐라 하지만 미국의 슈나이더 대 사 같은 사람은 한국 정부 행정력이 미국 정부보다 앞서고 있다. 그리고 저, 와싱턴 포스트의 오버도 퍼라는 기자가 한국에 대해서 잘 꼬집는 사람인데 누구하고 같이 저녁먹으면서 이야기 했는데, 유류파 동이니 뭐니 해도 한국 경제는 어느 나라보다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잘 되고 있고, 행정력은 미국보다 앞서니까. 그런데 정치는 왜 그렇게 못하냐 그래 (웃음)』 
청와대의 가족 노래자랑은 여기서 끝났다.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박 대통령의 장모 이경령 여사에 대해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할머니는 배운 것은 없었지만 인품이 훌륭했고, 판단력이 뛰어났습니다. 또 국모의 어머니라는 생각 을 늘 버리지 않고 몸가짐을 조심하시곤했죠』 
박대통령은 과묵하고 훌륭한 인품을 지난 장모님을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피란지 대구에서 육여 사와의 혼담이 오갈 때 큰 도움을 준 분은 다름아닌 장모 이경령 여사였다. 
또 결혼 후 시집간 딸의 어려운 살림을 돌봐준 것도 이여사였다.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돌봐준 은혜에 대한 보답, 그리고 훌륭한 인품에 대한 감복으로 인해 박정희는 결혼 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여사를 친부모 이상으로 받들어 모셨다. 특히 가족들에게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은 장모님』 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박중령 아저씨

홍국표씨(어린이 교통안전협회 사무총장)는 육영수 여사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어린 시절 저는 이모님(육여사)을 천사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조카들 앞에서 몸가짐 하나 흐트리 지 않았고, 너무나 우아하고 존경스러울 정도였죠』 
그가 박대통령과 처음 대면한 것은 일곱살 때 옥천 육여사 생가에서였다. 그 당시 육여사 가족들은 박대통령을 「박중령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추운 겨울에 키가 작달막한 박중령이 살그머니 홍씨의 뒤로 다가와 꽁꽁 언 손을 등에 집어 넣곤 했다고 한다. 홍씨는 그것이 좋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동작 이 굼뜨고 느리다 해서 박대통령이 별명을 곰이라고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 박중령 아저씨가 대통령 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을 못했다는 것. 

두 분이 청와대로 들어간 뒤 박대통령과 육여사는 홍씨 가족들에게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고 누누 이 당부 했다. 홍씨 가족들은 어머니 육인순씨가 돌아가셨을 때나 가족들이 결혼을 할 때 문앞에 「저 희들은 가정의례준칙에 의해 부조금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큼직하게 써붙여야 했다. 홍국표씨는 군에 입대해서도 최전방 수색중대에 배치돼 3년을 근무하는 등 어떠한 특혜도 기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74년 8월 15일 육여사가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싸늘한 시신에 되어 돌아왔을 때 가족들은 황망한 가슴 을 진정시키며 청와대로 갔다. 이날 박대통령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육여사 저격장면과 생전의 활동 모 습들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외국 유학지에서 늦게 도착한 근혜씨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표정으로 문상하는 모습을 홍국표씨는 눈물 젖은 눈으로 지켜 보았다. 

『육여사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습니다. 청와대 안에 작은 수영장이 있었어요. 저희 형제들 이 수영을 배우느라 청와대 수영장에 놀러갔습니다. 육여사께서 직접 나오셔서 과일을 깎아 입에 넣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 육여사는 「우리 식구가 모범을 보여야 된다」고 당부하셨는데, 그 날 이 육여사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어요』 
홍국표씨는 이모님이 손가락에 늘 값싼 수정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을 보며 『대통령 부인에게는 다 이아몬드 반지가 더 어울릴텐데…』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육여사는 절약과 검소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례식이 거행되기 전 이경령 여사는 『나라를 위해 총맞고 죽어간 내 딸 영수가 장하다』라고 울먹 이며 자신의 수의로 준비했던 꽃신을 육여사에게 신겨 보냈다고 한다(「한국의 퍼스트 레이디」고승 현 저). 
딸의 죽음으로 인한 극심한 충격으로 인해 이여사는 실어증에 걸렸고, 끝내 눈을 감을 때까지 말을 되찾지 못했다. 이날 가족 모임에서도 이여사는 말을 전혀 하지 못해 종이에다 『누구 노래를 시 켜라』하고 적어서 사회를 보던 홍국표씨에게 전해주었다. 

인간 박정희의 참모습

대통령이라는 자리 때문에, 온 국민이 라디오와 텔레비젼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아내를 잃었던 생생한 기억 때문에, 온 국민의 가슴에 심어진 영부인 육영수의 이미지 때문에 박정희는 재혼을 포기했다. 따 라서 먼저 간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깊어졌고, 죽은 아내의 그림자를 오래도록 부여안고 살아야 만 했다. 
1972년 유신선포 특별선언에서 밝힌 그대로 박정희는 조국 통일과 민족 중흥의 제단 위에 모든 것을 바치기 전에 아내의 목숨을 먼저 바쳐야 했다. 다음은 아내 잃은 대통령의 허전한 마음을 적나라하게 전해주는 일기의 한 부분이다.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 지 41일째. 어머니 도불편하신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 느냐 하는 말 한 마디 없소. 잘있었느냐는 인사 한 마디 없소. 아니야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인사를 했겠지. 다만 우리가 당신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다. 당신도 잘 있었소.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소.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옆에 있다고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오겠소, 고이 잠드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올 테니. 그럼 안녕」(1974년 9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의 일기) 
고독한 절대 권력자의 뒤안길에 얽힌 삶의 허무…. 풀 죽은 목소리로 『할머니 아무 것도 안드셨다』 고 독백하는 이 장면이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이면에서 발견되는 인간 박정희의 참 모습일지도 모른다.

<편집자 주> 본 내용은 월간조선 96년 8월호에서 발췌하여 옮긴 것입니다. 



박정희와 술
朴正熙 대통령은 술을 좋아하기도 했고
술과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다. 
朴대통령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월간조선 85년 4월호 '朴正熙 대통령과 술'이라는 기사에 자세히 나와있다. 그 기사에서 朴대통령의 술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 수록해본다. 

<...70년부터 9년간 대통령경제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했던 박진환씨는 이렇게 말한다. 
"오후 5시쯤 되면 대통령이 우리한테 전화를 했다. '보좌관들 다 있어? 식사 같이 해'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6시에 식당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막걸리가 너무 지겹게 나와서 오늘도 또 막걸린가 하고, 조금 먼저가서 식당에 목을 쏙 내밀고 살피곤 했다. 그때 막걸리통이 있으면 아주 질색을 했다. ...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시버스 리걸이 나오는데 그것만 보면 우리는 얼굴이 환해져서 조그맣게 소리쳤다.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식사습관이 어찌나 농민다웠던지 술상에선 예사로 김치를 손으로 집어 먹었고 김을 밥숟갈에 척 붙여서 먹었으며 닭고기를 먹을때도 손을 잡고 먹음직스럽게 뜯어 먹었다고 한다. 

...58년 6월 말 당시 기자였던 Y씨는 1군 사령관이었던 송요찬 장군을 만나러 갔는데 송장군이 없어서, 참모장인 박정희 장군을 대신 만났다. 박장군은 Y씨를 맞아 '먼길에 오셨으니 그냥 갈 수 있느냐'면서 중국집에 가서 술대접을 했다. 둘은 배갈을 먹기 시작했다. 둘은 누가 술이 더 센가 시합을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빈병을 나란히 눕혀가면서 마셔댔다. 이렇게 하고 보니 빈병이 24개가 될 때까지 마셨다. Y씨는 이것이 박대통령이 생전에 세운 최고기록일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술자리에 앉으면 먼저 앞에 놓인, 젓가락, 술잔, 재떨이 같은 것을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다시 놓았다. 이렇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게 버릇처럼 돼 있었다. 그렇지만 술자리에선 참석한 사람들을 아주 편안하게 해줬다. 

...박대통령은 가끔 막걸리에 맥주를 타서 '맥탁'을 만들어 마시기도 했고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막사이'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술에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박대통령은 흘러간 옛노래인 '짝사랑(으악새)' 이나 '황성옛터'를 불렀다.> 

 박대통령 주량은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쓰러진 74년 이후부터는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도 술과 함께 있었다. 
1979년 10월26일 박대통령의 마지막 궁정동 술자리에서 그가 들었던 마지막 잔은 막걸리와 함께 좋아하던 시버스 리걸이었다. 

<월간 조선 '한국의 대통령'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