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포스코 40년 박태준 명예회장

동 아 2008. 3. 27. 02:2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그건 신화도, 기적도 아니었다. 인간 의지의 승리였을 뿐이다. 세계 철강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포항종합제철. 2002년 이름이 포스코로 바뀐 이 회사가 4월 1일이면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박태준(81·사진) 명예회장을 빼고 포철을 말할 순 없다. ‘한국 제철의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그를 22일 서울 파이낸스센터 그의 사무실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이에 앞서 2월 28일 그를 별도로 만났으며, 3월 14일에는 포항을 방문해 제철소 곳곳을 둘러봤다.

 

그는 “한국 경제가 계속 번영하려면 기술 우위를 다지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기술자를 별로 위하는 것 같지 않아 큰 걱정이다. 중국과 인도가 저렇게 빨리 우릴 쫓아오고 있는데 지금 상태론 안 된다. 기술 개발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벌써 40년이 됐습니다.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듭니까.

“내가 어떻게 두 개 다 했지? 솔직히 이런 생각이야. 포항과 광양, 두 곳의 엄청난 제철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까마득하기만 해. 내가 역시 나이가 든 모양이야. 당시엔 그까짓 것 하며 달려들었는데…. 정말 그땐 일에 미쳤었지.” 

 

-스스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연산 1000만t 이상의 제철소를 두 개나 지은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곤 없어. 내가 보고 배웠던 신일본제철(신일철)에도 그런 사람은 없지. 1992년 10월 광양제철소 4기를 끝내고 나니 ‘아,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했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러곤 후배들에게 경영을 맡기고 물러났지. 벌써 15년이 지났어.”

 

- 초기엔 참으로 막막했을 것 같아요.

“신일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87년 작고) 회장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어. 박정희 대통령의 제철 입국 집념과 이나야마 회장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의 포철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온갖 고생 끝에 73년 6월 9일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왔지. 그건 하나의 ‘사건’이었어. 모든 포철 직원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고, 대한민국이 공업국가로 첫발을 떼는 순간이었어.” 

 

-자금 조달은 어떻게 했습니까.

“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어. 하지만 허사였어. 한국의 종합제철소는 성공 가능성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묘안을 짜낸 게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받은 대일청구권 자금이야. 박 대통령도 나의 이런 아이디어를 적극 지지했어. 3억 달러 중 당시 쓰고 남은 잔액은 7370만 달러였어. 여기에 일본 수출입은행에서 5000만 달러를 빌려오면서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할 수 있었지.”

 

-‘한국의 종합제철소 사업은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썼던 세계은행(IBRD) 연구원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86년 런던으로 출장 갔을 때 문제의 보고서를 썼던 영국인 J 자페 박사를 만났지. 나는 포항제철 덕분에 한국에 조선소도, 자동차 공장도 생겨나 잘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어. 그러면서 69년 보고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지. 자페 박사가 그러더군. 지금도 보고서를 쓴다면 결론은 같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때 자신이 파악하지 못했던 게 하나 있다고 해. 박태준이란 변수라는 거야. 박태준이란 사람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틀린 보고서를 썼다는 얘기였지.” 

 

-포철이 쑥쑥 커가면서 일본 철강업계에서 한국에 너무 많은 기술과 정보를 준 게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고 하던데요.

“73년 103만t짜리 1고로를 예상보다 짧은 시간에 완공하는 걸 보고 일본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어. 그때 이나야마 회장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들었어. ‘이봐, 많이 가르쳐 준 게 문제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들의 의지와 열정이 너무 강했던 거야. 우리 잘못이 아니라 그쪽이 워낙 잘했던 거라고.’”

 

- 제철소를 지으면서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세 가지는 분명하게 지켰지. 첫째, 공기를 서두르고 건설단가는 최대한 낮춘다. 둘째, 부실공사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마지막은 기술인력 배양이었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이 세 가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었어.”

 

-후배 경영인들에 한 말씀 하신다면.

“93년 포철을 떠나면서 ‘하루빨리 광산을 사라’고 했어. 사실 철강사업은 좋은 철광석과 유연탄을 얼마나 싸게 확보하느냐가 관건이거든. 그런데 이 친구들이 내 말을 제대로 안 들었어.”

 

-공무원이나 공기업의 비효율성이 자주 지적되고 있는 요즘인데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요즘 공무원들 중에서 나라를 위해 진정으로 애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어. 그래서 안타까울 때가 참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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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취재노트에 열심히 받아 적고 있는데 갑자기 박태준 명예회장의 목소리가 잠기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기자가 보여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포철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순간에 찍은 것이었다.

 

직원들이 환희에 넘쳐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다들 흥분한 표정이었지만 딱 한 사람은 예외였다. 박태준 사장이었다. 그의 눈은 초점을 잃고 있었으며, 표정은 매우 심각해 보였다. 허탈감마저 배어 있는 눈동자였다.  기자가 그 사진을 보여주며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고 하자 그만 목이 메고 만 것이다.

 

“그때 쇳물이 쏟아지는 걸 보면서 난 그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어. 물론 그건 꿈에서도 바라던 일이었지. 하지만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걱정이 엄습하더군.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중압감이 날 압도했어.”

 

-1968년 4월 1일 창립식 얘기부터 해 주시죠.

“그 전해 11월 30여 명이 종합제철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내가 위원장을 맡았어. 하루에도 몇 번씩 회의를 하며 준비한 끝에 다섯 달 뒤 포철 주식회사 간판을 내걸었어. 당시 창립멤버가 34명이야. 이미 고인이 된 분도 꽤 여럿이지. 나 때문에 고생들 참 많이 했어. 정말 고마운 분들이야.”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먀 회장이 발 벗고 도와줬다고 하지만 철강을 모르면 알아듣기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밤잠을 줄이고 제철소와 철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어. 당시 41세이던 난 공장 부지에 내가 살 집을 지었어. A동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남아 있지. 식구들은 서울에 있었고 난 혼자 여기서 살았어. 저녁에 들어와 잠 들기 전까지 일본 철강업계에서 나오는 잡지와 책을 쌓아놓고 닥치는 대로 읽었어. 서너 시간씩 자면서.”

 

-직원들 교육은 어떻게 시켰습니까.

“사실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하면서 윗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랫사람들 건의만 받아서는 일을 추진할 수 없어. 그래서 내가 먼저 공부하면서 직원들을 잡아 끌었지. 직원들도 공부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 사장이라는 사람이 매일 회의에서 새로운 얘기를 꺼내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직원들이 내 비서를 통해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알아내 그걸 구해 읽으면서 지혜를 모아 나갔어. 일을 하다 막히면 나나 직원들이 바로 일본으로 날아가곤 했어.”

 

-직원들은 회장님을 참 무서워했을 것 같아요.

“꾀 안 부리는 직원은 그럴 일이 없었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직원들은 야단 좀 맞았지. 매일 현장을 몇 번씩 돌아다니면 누가 열심히 하는지 요령을 피우는지 훤히 알 수 있었으니까. 모든 게 그렇지만 특히 제철소는 기초공사가 잘못되면 다 못 쓰게 돼. 그 위에 육중한 설비를 얹어야 하는데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다 헛일이 되기 때문이야. 그래서 아주 작은 잘못도 용서할 수 없었어. 그런 힘든 시절을 끝까지 견뎌낸 직원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야.”

 

-회장님은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서 대학(와세다)까지 다니셨죠. 그때 몸에 밴 일본식 사고와 의사소통 방식, 쌓은 인맥이 제철소 건설에 큰 힘이 됐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사실이야. 세상에 소통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내가 일본말을 못해 통역을 끼고 일을 추진했다면 그렇게 잘되진 않았을 거야. 언어와 정신문화는 특히 일본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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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 9일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는 순간 직원들이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가운데 박태준 사장의 표정은 달랐다. 그는 “그때 난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나야마 회장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당시 나는 막 마흔 살을 넘긴 한창 때였지. 그분이 내 열정과 패기를 높이 샀던 것 같아. 내가 복이 많아 그런 분을 철강의 스승으로 만났지. 그런데 포항에 이어 광양만에 또 제철소를 짓겠다고 하자 일본 업계에선 경계론이 일기 시작했어. 더 이상 한국에 기술을 이전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였지. 그때 난 이렇게 말했어. ‘감사합니다. 이젠 안 도와주셔도 좋습니다’라고. 포항에서 쌓은 경험과 기술 덕분에 자신이 생겼던 거야.”

 

-결국 지금은 신일철과 세계 정상을 다투는 경쟁자가 되었는데요.

“그렇지. 하지만 난 포철과 신일철의 기본 관계는 신뢰와 협력이라고 봐. 사람이나 기업이나 신뢰를 망가뜨리면 안 되지. 신일철이 준 혜택을 고마워하고 가능한 한 우호적으로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해. 선의의 경쟁은 하지만 지금도 양사는 협력이 잘 이뤄지는 것으로 알고 있어.”

 

-회장님의 혜안은 교육투자에서도 입증됐습니다.

“그때는 주위에 쓸 만한 학교가 없었어. 자연히 젊은 직원들이 포항에 내려와 살기를 꺼렸어. 학교를 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 가족을 서울에 놔둔 상태에선 일에 전념할 수 없었어. 그래서 71년 초 제철장학회를 만들고 바로 유치원부터 짓기 시작했어. 그게 지금은 포스텍(포항공대)까지 합쳐 15개로 불어났지.”

 

-교육재단을 만들 때 종자돈이 큰 화제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외자를 받아 사업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정치자금을 내야 했어. 하지만 난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런 돈을 내고서는 제철소를 지을 수 없다’고 설득해 여기서 예외가 됐어. 그런데 어느 날 공돈이 생겼어. 용광로 설비를 들여오면서 보험에 들었는데 보험사에서 리베이트로 6000만원을 주는 거야. 평소 대통령에게 은혜만 입었지 뭐 하나 갚은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난 그 돈을 들고 상경해 박 대통령에게 드렸어. 그분은 바로 나에게 돌려주면서 ‘술을 받아 먹든지 임자 맘대로 쓰라’고 하시더군. 그래서 다시 포항으로 내려오면서 이 돈으로 교육재단을 만들기로 결심했지.”

 

-설비 조달과 관련, ‘종이 마패’라는 게 있었다는데 그게 뭡니까.

“당시의 자재 구매 및 조달 방식으로 제철소를 제때 완공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어. 그래서 난 박 대통령을 독대해 내가 요구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대통령이 요구사항이 뭐냐고 묻더군. 그래서 내가 한 장의 종이에 설비 조달에 관한 재량권을 인정해 달라는 5개 조항을 썼지. 다 쓰자 그분은 ‘좋아, 그대로 하라고’하며 왼쪽 상단에 친필 사인을 해줬어. 이게 이른바 종이 마패야. 결국 대통령은 제철소 건설을 위해 나에게 전권을 주었던 셈이지. 당시 정치권 실세들이 정치자금을 요구할 때 이걸 보여주면 찍소리 못했지.”

 

-경영에서 손 뗀 지 벌써 15년이 지났는데, 지금 경영진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물러날 때 후배들에게 이렇게 당부했어. ‘광산을 사라. 좋은 원료를 확보해야 더 클 수 있다’고. 물론 내가 떠난 뒤 포철은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지난 10여 년간 광산 투자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아직도 못하고 있는데 지금 당장부터 다시 눈에 불을 켜고 좋은 광산을 찾아나서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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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경제 에디터■

◇하와이 구상=제철소 건설을 위해서는 외자 확보가 최우선 과제였다. 한국 정부 요청에 따라 미국·영국 등 5개국 8개사로 국제제철차관단(KISA)이 구성됐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 가능성이 작다며 차관 제공을 꺼렸다. 포철이 정식 출범하고도 상황은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참다 못한 박태준 사장은 1969년 초 미국을 방문했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귀국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른 그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하면서 받은 3억 달러의 대일청구권 자금 가운데 남은 돈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귀국 즉시 청와대로 들어가 그런 생각을 털어놓았다. “대일청구권 자금은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의 대가인 만큼 그걸로 자립경제의 초석을 놓는 데 쓴다면 아주 뜻 깊은 일이 될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무릎을 쳤다. 잔액은 7370만 달러였다. 여기에 일본 수출입은행 차관 5000만 달러를 합쳐 1억2370만 달러가 확보됐다. 포철 출범 뒤 1년 반 만에 자금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우향우 정신=1968년 1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공사장을 찾았다. 그의 13차례 현장 방문 중 첫 번째였다. 불도저들이 533채의 가옥을 마구 밀어붙이고, 여기저기서 초가가 불타고 있는 모습이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거, 남의 집 다 부숴 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긴가.”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박 대통령이 혼잣말을 했다. 옆에 있던 박태준 사장은 막중한 책임감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끼며 이렇게 답했다. “각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우리는 반드시 성공합니다.” 그 다음부터 박 사장은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제철소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실패하면 현장사무소에서 나가 바로 우향우 해 다 같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자.” 그를 평생 옆에서 보필하고 있는 이대공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은 “당시 박 사장은 스스로를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則生·죽기를 각오하면 산다) 정신으로 무장하고,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가짐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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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포항종합제철 준공식기념치사(致謝)■ 

 

박 태준 사장 이하 포항 종합 제철 전직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임석하신 내외 귀빈, 포항 시민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3년 전 1970년 봄에 여러분들이 보통「롬멜 하우스」라고 부르는 저 앞에서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마는 김 학열 전 부총리와 박태준 사장, 그리고 나 세 사람이 포항 종합 제철 기공식의 버튼을 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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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준공식 1973. 7. 3


그 후 만 3년 3개월만에 허허벌판이었던 이 곳에 이와 같은 초현대적인 훌륭한 종합 제철 공장이 준공된 데 대해서 심심한 치하를 드리는 바입니다.


금년 봄 연초 기자 회견에서 나는 중화학 공업 정책 선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공업이 지금 어느 단계까지 와 있느냐, 또한 앞으로 우리 공업이 어느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정부는 지금으로부터 중화학 공업 분야에 모든 정책의 중점을 두겠다는 것을 내외에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요즘 흔히 우리 나라 공업이 중화학 공업 시대의 문턱에 도달했다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우리 공업이 중화학 공업 시대의 문턱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벌써 문턱을 훨씬지나 상당히 깊은 분야에까지 진행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정부가 중화학 공업을 위해서 추진하고 있는 여러 가지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80년대 초에 가서는 우리 나라는 명실공히 선진 공업 국가 대열에 당당히 올라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오늘 이 자리에서 포항 종합 제철의 준공식을 보게 된 것은 매우 의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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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준공식 1973. 7. 3


중화학 공업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사업이 오늘 이 자리에서 준공됨으로써 과거에 우리가 꿈으로만 생각했던 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로서 하나하나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그 사실을 우리들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준공을 보는 이 포항 종합 제철은 생산규모에 있어서는 1차적으로 조강103 만톤 규모가 됩니다. 선진 여러 나라에는 지금 현재 연산 1천만톤을 넘는 대규모의 공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이 공장은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을 따라가기 위한 출발에 있어서 첫 개가를 여기서 올렸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 공장은 금년부터 계속해서  260만톤으로 확장 공사를 하고,  또 계속해서 79년말까지는 700만톤 규모까지 확장할 계획을 지금 추진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1980년대에 가면 우리나라의 철강수요가 국내만 하더라도 약 1,200만톤 내지1,300만톤을 넘을 것이라는 추정하에 포항 종합 제철의 1차, 2차 확장 공사와는 별도로 이와 병행하여 연산 약 1천만톤 규모의 제2종합 제철 공장 건설을 지금 예의 추진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공장들이 전부 계획대로 순조롭게 추진되어서 80년대 초에 가면 우리가 지금 지향하고 있는 100억달러 수출이라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보는 것입니다.


100억달러 수출을 할 때가 되면 총수출량에 있어서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약 60%를 넘게 될 것입니다. 100억달러 수출에서 약 60억달러 이상은 중화학 분야의 제품이 나가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을 할 때 오늘 준공을 보게 된 이 종합 제철은 앞으로 우리 나라의 중화학 공업의 하나의 근간이 되고 가장 핵심체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이 공장은 내외자 합쳐서 우리 나라 돈으로 약1천 2백억원이라는 돈이 들어갔습니다. 경부 고속 도로 건설에 428억원이 들어갔으니까 경부 고속도로 3개 몫의 자금이 이 공장에  들어갔다는 결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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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종합제철 준공식 1973. 7. 3


이와 같이 우리 나라 역사 이래 단일 사업체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이 공장이 지난 3년 3개월 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과 애로를 극복하고, 오늘 예정보다도 약1개월이나 앞당겨서 훌륭하게 준공을 보게된 데 대해서 다시 한 번 박 사장 이하 포항 제철의 모든 직원들과 이 사업에 참여한 국내외의 기술자, 건설 업자 기타 관계 공무원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시에 오늘 이 자리를 빌어서 이 공장이 건설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신 일본 정부 당국과 일본의 관계 업계 여러분들의 협조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고 이 지방 주민 여러분들과  유관 기관 여러분들이 그동안 모든 면에서 적극적인 협조와 도움을 주신 데 대해서 또한 감사를 드리고, 이 포항 종합 제철이 앞으로 우리 나라 중화학 공업 발전에 명실공히 핵심적이고 근간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줄 것을 당부하면서 다시 한 번 여러분들의 그 동안의 노고에 대해서 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1973년 7월 3일

대통령 박정희


 

■각하! 이제 마쳤습니다.■

  

각하! 
불초(不肖)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포항제철은 '빈곤타파(貧困打破)와 경제부흥(經濟復興)'을 위해서는 일관제철소 건설이 필수 적이라는 각하의 의지에 의해 탄생되었습니다. 


그 포항제철이 바로 어제, 포항, 광양의 양대 제철소에 조강생산 2,100만톤 체제의 완공을 끝으로 4반세기에 걸친 대장정(大長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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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포항제철공장시찰 1972. 11. 1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몸 희생활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1967년 9월 어느 날, 영국출장 도중 각하의 부르심을 받고 달려온 제게 특명(特命)을 내리 시던 그 카랑카랑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25년이란 긴 세월 을 철(鐵)에 미쳐, 참으로 용케도 견뎌왔구나 생각하니 솟구치는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 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형극과도 같은 길이었습니다.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불모지에서 용광로 구경조차 해본일이 없는 39명의 창업요원 을 이끌고 포항의 모래사장을 밟았을 때는 각하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자본과 기술을 독점한 선진철강국의 냉대 속에서 국력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숨짓기도 했습 니다. 터무니없는 모략과 질시와 수모를 받으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리고 싶었던 때도 있었 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철강은 국력'이라는 각하의 불같은 집념, 그리고 열세 차 례에 걸쳐 건설현장을 찾아주신 지극한 관심과 격려였다는 것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포항제철소 4기 완공을 1년여 앞두고 각하께서 졸지에 유명(幽明)을 달리하셨을 때는 '2,000만톤 철강생산국'의 꿈이 이렇게 끝나버리는가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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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포항제철 제2고로화입식 참석 1976. 5. 31

  

그러나 저희는 '철강입국(鐵鋼立國)'의 유지를 받들어 흔들림없이 오늘까지 일해 왔습니다. 그 결과 포항제철은 세계 3위의 거대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였으며, 우리 나라는 6대 철강대 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각하를 모시고 첫삽을 뜬 이래 지난 4반세기 동안 연 인원 4천만명이 땀흘려 이룩한 포항 제철은 이제 세계의 철강업계와 언론으로부터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철강기업으로 평가받 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제 힘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필생의 소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순간, 각하에 대한 추모의 정만이 더욱 새로울 뿐입니 다. 

"임자 뒤에는 내가 있어. 소신껏 밀어 붙여봐"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저를 조국 근대화의 제단으로 불러주신 각하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생각하면서 다만 머리숙여 감사드릴 따 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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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포항제철 제3고로화입식 참석 1978. 12. 8

  

각하! 
염원하시던 '철강 2,000만톤 생산국'의 완수를 보고드리는 이 자리를, 그토록 사랑하시던 근영·지만군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녀분들도 이 자리를 통해 오직 조국근대화만을 생각하시던 각하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 기며, 각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더욱 성실하게 살아갈 것이라 맏습니다. 저 또한 옆에서 보살핌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다시 한번 약속드립니다. 

  

각하! 
일찍이 각하께서 분부하셨고, 또 다짐드린 대로 저는 이제 대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잔정한 경제의 선진화를 이룩하기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 습니다. '하면 된다'는, 각하께서 불어넣어주신 국민정신의 결집이 절실히 요청되는 어려운 시기입니다. 


혼령이라도 계신다면, 불초 박태준이 결코 나태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25년전의 그 마음으 로 돌아가 '잘 사는 나라'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도록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불민한 탓으로, 각하 계신 곳을 자주 찾지 못한 허물을 용서해 주시기 업드려 바라오며, 삼 가 각하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안면(安眠)하소서! 


1992년 10월 3일

불초(不肖) 태준(泰俊)올림

                                     

<1992년 10월 3일 故 박정희 대통령 묘소 참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