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

나라를 구한 대통령, 나라를 망친 대통령

동 아 2008. 1. 12. 23:30
■ 나라를 구한 대통령, 나라를 망친 대통령
  “하인에게 영웅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주인이 영웅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하인이 한갓 하인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
[ 고정일(高正一 )·동서문화사 발행인 ]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는 군사혁명이라는 비상수단으로 정권을 잡았다. 그는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시설도 없는 가난한 나라를 최단기간에 유례없는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 그는 스탈린, 마오쩌둥, 차우셰스쿠, 김일성처럼 정적을 말살하지 않고 희대의 고도성장을 이룩했다. 그것은 국가적 국민적 ‘선(善)’이었을까 권욕적 독재적 ‘악(惡)’이었을까.
  
  박정희는 군사쿠데타의 지도자답지 않게 부끄럼 타고 겸손하며 남들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면서 면전 칭찬에는 겸연쩍어한다. 그는 인기를 의식하여 그럴듯한 수사를 늘어놓지 않는 성격이다. 그러나 무책임하고 비생산적인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강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한 번도 치우려 하지 않은 겹겹이 쌓인 쓰레기더미 한가운데 서있는 것 같았다. 나는 오염된 지역 전체를 삽으로 퍼내듯이 모든 사회악을 뿌리 뽑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홍수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집을 짓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헌정제도를 운영하면서 과거의 행동을 겸허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혁명의 기본요소는 한국의 산업혁명을 단행하는 것이다. 나의 주관심은 경제혁명이었다. 인간은 우선 먹고, 숨 쉬고 나서야 비로소 정치, 사회, 문화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이를 위해 나는, 나를 민족의 제단 위에 바친다.”



朴正熙와 5.16혁명
1960년 민중과 학생의 피의 궐기 4.19에 의해 정권을 잡은 제2공화국 민주당정부는 구파 김도연·윤보선·김영삼 세력과 신파 장면·박순천·김대중 세력으로 분열되어 권력주도권 다툼만 할 뿐, 국민들에게 무능 이외에 보여준 것이 없다. 장면 총리는 국가적 위기의 본질을 잘 몰랐으며 그에 대처할 위기관리 능력도 없었다. 부정, 부패, 폭력, 혼란 온갖 사회악이 뿌리깊이 잠재해 있었으며, 자유당정부의 붕괴로 데모 만능사조가 풍미, 사회질서는 더욱 혼란의 수렁에 빠졌다.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암시장, 실업자가 급격히 늘어났으며 결국 장면정권의 지지기반이던 도시중산층이 등을 돌렸다.
 
  이때에 박정희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1961년 5월 16일 뜻을 같이하는 젊은 군인들과 군사혁명을 단행했다. 민주당 정권의 무능으로 혼란과 표류에 지친 윤보선 대통령과 국민들은 ‘올 것이 왔다’며 환영했다. 朴正熙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로 가는 교두보 확보를 위한 행정적 민주주의의 실천, 경제적으로는 근대화를 위한 경제적 악순환의 시정과 자립경제기반 구축, 사회적으로는 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통한 부정부패 일소,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한 국민기풍의 쇄신, 그리고 외교안보에서는 국제협력 증진과 ‘선건설, 후통일’ 기반 조성 등을 5·16혁명의 목표로 삼았다.
  
  
  박정희와 경제철학
 
  “폭우가 쏟아지는 야반 0시. 그때 나는 서재의 일우에 앉아 붓을 멈추고, 멍하니 비에 젖어가는 밤의 가로를 내다보고 있었다, 문득 저 거리로 뛰어나가 내 재주로 저 비를 막거나, 아니면 저 비 때문에 수없이 울고 있을 동포와 더불어 이 밤을 지새우고 싶은 격정을 느꼈다. 5천년을 하루같이 시달려온, 피곤한 민족이 모처럼 일어서려는 비장한 이 마당에, 다시금 하늘은 시련을 내리다니. 그러나 우리는 일어서야 했고 이 고비를 싸워 넘어서야 했다.”
 
  -1963년 7월 하순, 박정희의 일기
  
  박정희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빈곤 추방’이라는 통치철학을 형성한 것이다. 그는 전국에 밤나무 등 유실수를 심도록 독려했다.
  
  박정희는 소년시절부터 자립생활을 몸에 익혔다.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의 일생에 큰 교훈이 되었다. 환경은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우치게 했고, 그의 결의를 굳건히 다져주었다. ‘가난’은 그의 스승이었다.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 한국의 건설’이 그의 소망이었다.
  
  박정희가 이룩해놓은 경제발전은 ‘성숙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었으며, 이를 가능케 하는 절대조건이었다. 그의 경제철학은 경제발전이 국가안보와 통일의 기초가 된다는 것, 경제발전은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18년간의 통치기간에 1인당 국민소득을 87달러에서 일약 1,650달러로 끌어올림으로써 부정할 수 없는 ‘한국 경제기적의 주역’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1945년 이후 독립한 세계의 130여 개국 가운데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이다. 척박한 한반도에서 대통령과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만들어낸 피와 땀의 결실이다. 일본은 100년, 미국은 180년, 영국은 200년이 걸린 국민소득 1만 달러 달성을 우리는 30년 만에 해냈다.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 등 아시아의 여러 지도자들이 한결같이 박정희 경제모델을 벤치마킹하여 국가경제를 일으키려 노력했다. 그들 모두 박정희를 가장 존경스럽고 본받을 지도자로 꼽았다.
 
  덩샤오핑은 박정희의 외교·경제정책을 본받아 실사구시 전략을 구사, 미국과 협조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을 다국적 기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투자지역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천안문사태 때 탱크군단을 동원, 민주화를 열망하여 광장에 운집한 100만 학생시민에게 발포하여 2천여 명을 사살, 1만 2천 명의 부상자를 내는 참사를 빚었다. 그러나 오늘 중국인들은 그를 천하대란에 빠진 나라를 구한 은인으로 추앙한다.
 
  리콴유는 국민의 인권·언론을 통제, 길거리에 휴지 한 장을 버려도 곤장 20대, 마약소지자는 사형 등의 무시무시한 형벌로 국민들을 통치, 싱가포르를 아시아 최고의 부국으로 만들었다.
 
  장제스, 장징궈는 1949년 중국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후퇴한 뒤, 국민정부를 다시 세워 1987년까지 38년간 계엄령 하 1당 독재정치를 펼쳤지만, 경제우선 정책으로 대만의 발전을 이끌었다. 국민들은 이들을 독재자라고 비난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구하고 일으킨 은인으로 추앙하고 존경한다.
  
  
  
  박정희와 새마을운동
  
  박정희는 유달영이 쓴 ‘새 역사를 위하여’를 읽고, 실의에 빠진 덴마크를 부흥시켜 국부로 추앙받는 국민운동가 그룬트비와 달가스에게 크게 감동받았다. 이에 영향 받은 그는 농민들에게 근면·자조·협동 정신을 각성시키고 이를 실천하는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한국 농촌 부흥의 결정적 요인을 만들었다. “빈곤을 자기의 운명이라 한탄하면서 정부가 도와주지 않아 빈곤 속에 있다고 책임을 미루는 농민은 절대 일어설 수 없다. 의욕 없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이다. 국가도 게으른 사람은 도울 수 없다.” 박정희는 나태한 농민을 꾸짖고 부지런한 농민은 격려하면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는 새마을운동 초기 환경개선 사업에서 점차 소득증대 사업으로 초점을 이동시키며, 농가소득 향상과 비농업소득 증진 등 두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1965~69년 기간 중 정부가 도시중심의 공업화 정책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을 때, 농가 소득은 도시가구 소득에 비해 증가율이 1/4에 불과했다. 그러나 높은 곡물가격 정책을 채택하고 새마을운동을 위해 집중적인 투자를 했던 1970~76년 기간 중 도농간 상황이 뒤바뀌어 도시가구 소득이 4.6% 증가한 반면, 농가 소득은 9.5%나 높아졌다. 새마을운동을 통한 농·공 병진 발전전략이 없었다면, 1970년대 한국의 중화학공업화 노력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중화학공업 유신선언
 
  우리 사회에 팽배해진 무질서와 비능률, 국가적 사명감도 잊은 채 당리당략 권력투쟁에만 몰두하는 정치권과 정당들의 작태에 박정희는 크게 탄식했다. 과연 그들에게 국가적 과업을 맡길 수 있느냐고 국민들에게 반문했다. 그는 자유를 방종과 혼돈하지 말 것,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독재라고 비난하지 말 것, 파쟁과 갈등을 민주주의로 착각하지 말 것 등을 주창했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을 선언한다. “북한과 대치한 어려운 여건 하에서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성장시켜 나가려는 고심의 일단이다.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국가의 독립과 국민의 자유·번영을 추구해 나가자는 우리 나름의 고심작이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목표보다는 경제개발이라는 현실적인 목표를 추구했고,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유신체제는 민주주의, 근대화, 국가안보라는 3대 국가목표를 적절히 조화시킨 체제라고 생각했다.
 
  중화학공업화 프로그램은 북한에 대해 전면적 우위를 차지하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박정희의 비전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굴하지 않는 강력한 정치적 뒷받침을 필요로 했다. 중화학공업화의 주역인 박정희· 김정렴· 오원철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유신체제, 특히 박정희가 제도화한 ‘대통령 직접지시’, 정부지원특혜, 정부지급보증 체제는 박정희와 그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정부 주도 중화학공업화의 강력한 추진 도구 역할을 했다. 사실 많은 한국 테크노크라트들은 박정희가 쥔 막강한 힘의 기반이었던 유신체제가 국가의 근본적 목표, 즉 부강하고 공업화된 국가 건설을 달성하고 대미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획기적인 공업 구조 개혁을 시행하는 데 절대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그 신념을 자부했다.
 
 
  朴正熙와 리더십
 
  남북 간의 대반전은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박 정권은 끊임없이 미국을 압박해 군 현대화 지원자금을 끌어들이면서 국방과학연구소 설립(1970년), 5개년 군 현대화계획(1971~76년), 율곡사업(1974년) 등을 밀어붙였다. 무엇보다도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을 하나의 패키지로 추진해, 군도 현대화하고 나라도 ‘근대공업국가’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유신체제는 한국이 고도 경제성장을 위해 치러야 했던 큰 대가였다. 중화학공업과 유신개혁 ― 두 축은 서로 떼어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하나였다. 하나 없이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에 성공한 것은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계획이 그의 이상대로 정확하게 시행되도록 국가유신체제로써 뒷받침되고 강력히 훈련시켜 나갔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유신혁명이 없었다면,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신헌법은 내용이나 구조면에서 서구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다분히 ‘비민주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1970년대 한국 정치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朴正熙의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초를 만들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朴正熙에게 유신과 중화학공업 양날의 선택은 온몸을 바치는 혁명가의 비장한 결의였다.
 
  세계는 박정희를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는 한국을 “부존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교육 강조와 확산을 통해 성공적으로 산업사회에 진입한 대표적 국가”로 평가했다. 1999년 8월 미국의 주간지 ‘타임’은 그를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20세기 아시아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20명 중 하나로 뽑았다. 국민들은 진정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강력한 애국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박정희와 청렴 청빈
<72년 박대통령이 경북 청도군 새마을 사업장을 시찰하는 중 주민들이 반기고 있는 모습 >
역사를 돌이켜보면 독재자와 부패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참으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집무하던 청와대 본관 1층과 2층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물 절약을 위해 변기에 벽돌을 넣고 한여름에도 선풍기조차 돌리지 않았다. 식사 때는 밥에 꼭 보리를 30% 섞어서 쌀 절약으로 혼식을 몸소 실천했다. 점심 메뉴는 멸치국물에 만 기계국수였다. 육영수 여사와 측근들, 장관들도 청와대에서 회의를 할 때면 점심은 국수를 먹었다. 그의 전속이발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박대통령, 그분만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런닝셔츠를 입었는데 낡아 목 부분이 해져 있고 좀이 슨 것처럼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있었어요. 허리띠는 또 몇 십 년을 매었던지 두 겹 가죽이 떨어져 야들야들 따로 놀고 있고 구멍은 연필자루가 드나들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니까요. 자기 욕심은 그렇게 없던 양반이…….”
 
  그는 혁명적인 철학과 유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헌금, 기부금 때문에 기업인들과 접촉하는 것도 거부했다. 박대통령의 친인척 관리는 칼날같이 매서웠다. 대통령 일가를 빙자한 이권 개입은 절대 안 되며 이를 위반할 때에는 엄벌하겠다는 방침을 알리고 이를 강력히 실천했다.
 
  그에 이어 대통령직을 계승한 지도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처음에 경부고속도로, 울산공업단지, 포항제철건설을 반대했었다. 철학과 비전, 국가경영능력은 물론 도덕·윤리 수준에서도 박정희에 미치지 못했다. 두 대통령은 반란·부패혐의로 투옥됐었고, 두 대통령은 그들의 자식들이 불법축재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 대통령은 그의 최측근들이 불법자금수수로 줄줄이 감옥에 가고, 뇌물 받은 그의 친형은 법정에 서기도 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세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앞에 내세웠지만, 결국 국민들에게 잇달아 실망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대규모 불법 비자금 조달, 선동적 좌파기회주의 포퓰리즘으로 국정을 농단했다. 진정성과 숙고원려가 결여된 수도이전계획 등은 계층간 갈등 분열을 일으키고, 거기다 김정일과의 회담을 위해 퍼주고 매달리면서 북한주민 인권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결국 국가의 목표는 실종되었으며, 박정희에 의해 함양되기 시작한 대한민국의 사회적·제도적·도덕적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부가 닦아놓은 경제적 기반까지 무모하게 와해시킴으로써 국민들에게 값비싼 비용을 치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와 국가경영경륜
 

  2005년 10월 26일,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국립묘지를 참배, 박정희 대통령 영전에 머리 숙여 명복을 빌고 있었다. 그는 박정권에 반대, 민주화를 부르짖던 운동권 일급 수배자였었다. 현상금 200만원과 2계급 특진이 걸려 있던 1979년 10월, 부마항쟁 현장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던 중, 朴대통령이 시해되어 풀려났다.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죽음은 그에게 큰 허망함을 가져다주었다. 손학규는 영국으로 늦깎이 유학을 떠났다. 그는 영국에서 큰 충격을 받는다. 당시 국제사회에서 박정희와 한국의 경제발전은 큰 화제였다. 이념적 대립관계였던 공산권 국가 유학생들조차 ‘한국의 박정희가 자신들 비전의 모델’이라고 했다. 손학규는 이런 혼란을 겪으며 차츰 세상을 넓게 보는 시각을 가지게 된다. 이제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그 시대 선배들의 국가경영경륜을 겸손하게 평가하고 받아들인다고 고백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국내외 인사들은 그의 탁월한 정치경륜과 깊은 철학, 훈훈한 인간성을 말한다.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리처드 스틸웰은 박정희 대통령을 겪어보고 ‘저렇게 조국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정치인이 또 있을까’ 감동했다. 그에 대한 비판 중 “절대빈곤을 없앤 게 뭐가 그리 대단한가?” 말하지만, ‘굶주림’은 단지 배고픈 상태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일의 삶, 동물적 생존 그 자체의 불확실성이 만들어 내는 도덕적 타락과 병리현상 전체를 포괄하는 무서운 진실이 숨겨져 있다. 인간의 도덕성과 존엄성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박정희가 없었어도 연간 2천억 불을 수출할 수 있었을까?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던 이른바 민주인사들이 민주화가 시작된 이래 보여준 치졸한 작태는 도리어 그들이 증오하는 독재자의 업적을 새삼 돋보이게 하고 있다.
 
  1961년 5월 군사혁명이 일어났을 당시는 아침밥 먹고 나면 저녁밥을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제3공화국이 탄생하고 여인네들 머리채까지 팔아 1억불 수출을 돌파했다고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을 때도 나는 그에게 한 표도 찍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내가 굳게 믿었던 일들을, 통치권을 극대화하여 무서운 집념으로 해냈다. 경제개발을 줄기차게 추진, 성공시킴으로써 오늘의 민주화를 이룩하여 나를 부끄럽게 한다.
 
 
  대통령이란 무엇인가?
 
  민족시인 이은상은 말한다. “박정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 놓은 인물로 후세 사가(史家)들이 평가할 것이다. 세종은 성군이다. 한글창제를 비롯 내치(內治) 외치(外治)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왕조시대 절대권력 군왕으로 재위 32년 오랜 집권에서 그와 같은 업적이 가능했다. 그때 우리나라 인구는 약 1천만 내외로 극소수 양반층을 제외한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정치란 무엇인가! 백성들에게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는 것, 이것이 곧 정치의 근본이다. 세종은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성웅(聖雄)임이 분명하다. 적과 맞서 싸워 이긴 장수이며 자기 몸을 죽임으로써 나라를 구했다,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백 번 싸워 백 번 다 이김이 최상은 아니다. 싸우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이 으뜸이라 했다. 오늘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박정희는 북한의 김일성을 싸우지 않고 이긴 사람이다. 그는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경제와 문화의 기초를 닦아 놓았으며 한국민족을 세계사 중심부에 우뚝 세워놓았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1974년, 민주회복투쟁에 앞장선 윤형중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뛰어난 지도자다. 그가 민주화를 실천한다면 단군 이래 5천년 한민족사에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기반 쌓기 각고심혈’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한국을 세계 10대 경제국에 진입시키고 중산층을 탄생시켰으며 마침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누가 이를 부정할 수 있는가.
 
  오늘의 정치인들이여! 대의(大義)를 버렸는가. 진보를 참칭, 박정희를 능멸하면 할수록 그대들의 무능만 드러날 것이다. 먼저 정치를 하려면 그 근본인 애국애민부터 하라! 오늘의 박정희 사람들이여! 대의를 잃었는가. 온몸 바쳐 조국에 헌신한 그 열정은 어디로 갔는가. 무얼 주저하는가. 혼란에 처한 나라를 위해 그대들의 경륜을 사리지 말라! 오늘의 젊은이들이여! 대의를 공부하라! 조국의 내일을 이끌어 갈 그대들은 정략꾼들에 휘둘리지 말고 정신 차려야 한다. 세계 역사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생애를 바친 진정한 혁명가들을 찾아 읽으면 박정희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국민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고정일은...
  • 동서문화사 발행인(1956~현재)
  •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1977~1987)
  • 저서 : 『한국출판100년을 찾아서』, 『한국을 깨운 12사람』, 『고산 三國志』, 『고산 국어대사전』 外
  • 한국출판문화상 �조선일보 광고대상
  • 중앙일보 광고대상 �한국독서대상
  • 《자유문학》소설『청계천』신인상